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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r 27. 2024

173. 행복한 삶의 초석

[책 속에 생각을 담다]

173. 행복한 삶의 초석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다. 현대인들의 삶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모두가 시간에 쫓겨, 일에 쫓겨 살아간다는 것이다.

  일에 있어서도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그 원인이 사랑의 결핍에 있다고 본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소중히 여길 줄 아는가, 그리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을 내면에 가지고 있는가를 고려해 본다면, 그리고 그렇게 자기 안의 사랑을 키워 간다면 모든 일에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사랑은 근본적으로 타인을 향한 배려로부터 시작된다. 거꾸로 말하자면 스스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은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거름과 같다. 더불어 몸과 마음의 건강은 자신은 물론 타인의 삶도 소중하게 여기는 행복한 삶의 초석이다.

<사막별 여행자/무사 앗사리드 지음>



  행복한 삶이란 아주 간단하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욕망과 사랑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사랑은 행복의 초석이다. 그릇된 사랑은 불행을 만든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에서 사랑이 싹튼다. 참된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며, 자신과 타인을 존중한다. 즉 삶의 가치를 준다.



  그렇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행복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마치 남의 행복을 도둑질한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아니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하는 것 같다. 왜일까? 그것은 불안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악에서 온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겠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두 형제, 가인과 아벨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아니 침묵을 하셨던 것이다. 이에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기 시작을 하였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가인은 왜 그랬을까? 평소에 가인과 아벨은 형제간에 불화가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아벨은 가인의 행동에 의심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아벨은 형 가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기에 쉽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 4:8)

  가인은 그의 재물을 받지 아니함에 분하여 곧바로 아벨에 분함을 품었다. ‘시기’, ‘질투’, ‘분노는 어디에서 올까?

  먼저 아담과 여자를 살펴보자.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의 나무 곁에는 아담과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뱀의 그릇된 논리에 넘어간 두 사람은, 여자가 먼저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 주었다. 이들은 마음이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물으니,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핑계를 하였다. 이처럼 가인도 동생 아벨에 대해 분노하였다고 한다. 핑계를 한 것이나, 분노한 것이나, 그것은 같은 마음에서 온 것이다. 즉 뱀이 말한 것에 답이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가인이나 아담이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함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모든 악은 바로 인간의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보았던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악함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자신의 교만(우월과 열등으로 나타나는 악의 근본이다.) 때문에 핑계되고, 살인하고 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러한 인간의 교만이 타인을 멸시하고, 잘난 척하고, 폭력을 행하고, 약한 자(특히 어린아이, 여자, 가난한 자)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하고, 멸시하고, 짓밟고, 지배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담으로부터 악의 뿌리가 내리고 자라고 하여 인간세상을 악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 악을 합리화하고, 이념화하여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본적인 제도 속에서 인간을 지배하여 왔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첨단기술에 의해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인간을 초단위로 지배관리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세계에서는 어찌 행복을 쉽게 추구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제도와 지배자에게 물어야만 했던 것이다.

, ‘나는 행복해도 되나요?’, 또는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나요?’ 아니면 주인님,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 예를 북한사회를 보면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제도화된 국가와 사회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충성심에서 부여받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 속에는 수많은 제도가 존재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필수조건이 된 것이다.

  그 원조가 바로 노아홍수 직후에 영웅 니므롯이 인간들을 민족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였던 것에서 시작된 것이라 말하고 쉽다. 그 상징이 바로 바벨탑을 상징하는 것들이 통치자가 있는 대도시마다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하늘에 닿고 싶었던 인간의 소망이 담긴 건축물이 오벨리스크 탑인 것이다.

  이제 다시 인간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근원을 생각해 보자. 인간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에덴동산을 준비하셨으며, 인간(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안내를 했다. 에덴동산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에덴동산의 의미는 무엇일까? 축복의 동산, 행복한 동산, 기쁨의 동산 등을 말하고 있다. 동물원의 동물처럼 인간을 가두어 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며 동산을 관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 의무가 있으며,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창조자의 목적이었으며,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삶과 함께 하시길 바라셨던 것이었다. ? 창조자 하나님은 그래야만 했을까? 그것은 천지창조가 그분의 사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16)

  이것을 아는가? 창조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심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함인 것을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성을 통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시도록 하셨고, 유일하게 영원한 존재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물리적으로나 권력으로 빼앗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끝까지 참으시는 분이시라고 하시지 않는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빼앗는 것은 인간들이다. 인간의 교만한 마음(물론 이도 인간의 자유의지로 가진 속성이다.)으로 악한 생각을 품고 말하고 행하여도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으신다. 그만큼 인간을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한 삶이란 당연한 삶이며, 이러한 삶을 살도록 사랑의 씨를 뿌려놓으신 것이다. 첫째는 모성애, 다음은 남녀의 애정, 그리고 이웃사랑을 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새 계명을 주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였다. 이 계명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행복한 삶의 종류가 있는 게 아니다. 등급이 있는 게 아니다. 행복한 삶은 오직 하나다. 참다운 행복한 삶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삶에는 참된 사랑이 있는 것이다. 사랑은 자격증이나 복권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의 나무와 같다. 모성애를 통해 사랑의 씨가 심어지고, 싹이 나고 자라며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엽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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