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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Jun 16. 2024

6. 감사와 죄송하다는 말이 없는 사회

[自思考]

6. 감사와 죄송하다는 말이 없는 사회   

  

  자동차에 멈춤 장치가 없다면 쓸모없는 차가 될 것이다. 아무도 그 차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죄송하다는 마음과 감사하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모두 스트레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인간사회가 형성되지도 못할 것이다. 아니면 거기에는 지옥 같을 것이다. 바로 지옥인지도 모른다. 지옥은 고통스러워도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짐승은 그런 말을 모른다. 감사하다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모든 지식과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그 마음에 감사와 죄송함이 없다면 생존과 행복은 존속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죄송하다는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악한 영이 그 사람을 지배할 때는 인간의 본질을 파괴하려 하여 마음에 감사함과 죄송함을 제거해 버린다. 

  반항하는 아이들의 특징은 감사와 반성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노아 홍수 이전의 인간들도 감사와 회개를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도 감사와 회개를 하지 않았다. 

  감사와 죄송함(회개)은 다른 두 개가 아니며 하나인 것이다. 감사함 속에 죄송함이 들어 있고, 죄송함 속에는 감사함이 있다. 미국사회에서는 어릴 때부터 감사(thank you!)와 죄송(excuse me)를 먼저 가르친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사람됨의 기초인 것이다.

<엽서의 글에서>


  중 고등학교 영어시간에 들었던 말이 생각이 난다. ‘땡큐!’와 ‘익스큐스 미’는 미국가정에서부터 어릴 적에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라고 했다. 그 후에 나이 들어서 가족들을 데리고 첫 해외여행으로 미국을 갔을 때에 놀라운 사실을 보았다. 아니 영어선생님이 말한 것이 생각이 났다. 복잡한 길을 갈 때에도 함부로 밀치고 지나가지 않는다. 길에서 가족들과 수다를 하고 있을 때에 한 신사가 옆에서 길을 내어달라고 연속 ‘익스규스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우리 일행은 곧 길을 내주었더니 지나가면서 ‘땡큐’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이런 경우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는 경악하고 말았다. 아니 이것이 선진국인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인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생각하는 존재라면, 인격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순간 인간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었다. 어릴 적에 가정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국의 가정에서 먼저 배우는 것은 위아래의 관계를 깨닫는 것이었다. 즉 어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착하군.’, ‘예의 바르군.’, ‘훌륭한 사람이 되겠군.’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우리도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강아지 착하지!’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며 당연한 것처럼 여겼었다. 나중에야 학교에서 감사와 죄송함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한때에는 공무원이나 백화점 직원들이 가슴에 친절 리본을 달고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해 주었던 캠페인이 있었다. 그때에 알았다. 감사함과 죄송함은 친절히 대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캠페인이 끝나면 언제 그랬었나 하며 다시 무뚝뚝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른들이 이리 말한다. 너무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널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기 때문이란다고 말이다.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믿는다. 아니 복종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버릇없는 놈, 부모까지 욕을 먹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인간이 사는 길은 철저히 사회구조적인 관계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마치 ‘동방의 예의국가’[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나라였다. 그러면서 서양 놈들은 우리처럼 조상을 잘 모시지 않는 야만인들이라고 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그런 줄 알았다. 서양인들은 야만인, 동양인은 예의를 아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지식인은 방송을 통해 이런 글을 보여 화재가 된 적이 있었다. 「人人人人」 , 사람이란 한자 인(人)을 네 개를 붓으로 써서 보여주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에 한창 화재가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이 뜻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에 사람 없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 당시 방송으로 인해 화재가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 쩍 하면 사람 ‘인’ 자를 네 개를 써서는, 또는 길을 걷다가도 말로 사람 ‘인’ 자를 네 번 말하며 뭔가를 인생을 터득한 것처럼 으쓱되는 꼴에 함께 너털웃음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이들은 정말 그 뜻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우스갯소리를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멍청한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글자 ‘인’을 네 개나 쓰고 말하면서도 어떤 진리도 터득하지 못하고도 즐겁다고들 허접되는 것에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사실은 그 사람 ‘인’ 네 개나 나열하고는 글이라고 하는 것이나 그것이 속담이라고 유유히 자랑하는 무지(無知)랭이에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그저 겉보기에만 만족하고 깊이를 알고자 하지 않는데 그저 침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유행어는 조선시대에 좀 안다는 유생들에게서 많이 유행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실제로 인간평등을 말하기 위함보다는 유교적 체제 속에서, 조선의 체제 속에서 해프닝? 해학? 그런 식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는 해학(諧謔)이 흔했으며, 특히 지식인들에게서 더 유행처럼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시절에 나도 유머이니 해학이니 하며 임어당의 해학을 정독하면서 친구들에게 사용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훗날에 깨달았다. 해학이나 유머니 하는 것에는 그냥 인생의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즉 해학이나 유머, 조크(joke)이나 익살 등은 결코 진실한 마음에서 온다고 말할 수가 없겠다. 좋게 생각하면, 인간관계에서 위기나 곤란함을 벗어나기 위한 임기응변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임기응변에 능통하면 똑똑한 줄로 안다. 그리고 정치인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眞實)’[Truth]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국 돈인 원달러[one dollar]를 좋아한다. 그 지폐에는 이런 글씨가 있다.      


「In God We Trust」     


  얼마나 놀라운가? 일반인이 통용하는 지폐 속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특히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지폐(돈)에 말이다. 이 문구를 아주 쉽게 해석한다면, ‘신 안에서 우리는 진실하다.’의 뜻이 아니겠는가? 물론 지금의 미국은 초기의 미국이 아니다. 미국의 역대의 대통령들 중에는 조금씩 초기의 미국정신을 비틀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의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을 기독교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는 평등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종교의 평등, 인종의 평등, 성별의 평등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성차별 금지법을 만들었다. 결국은 미국도 신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멋진 문구, 「In God We Trust」는 미국시민 속에서 희석되었고, 인본사상과 인간의 법을 우상화하게 되었다. 그것은 즉 ‘바벨탑의 정신’에서 온 것인 것이다. 이것은 신을 외면하고, 제외하고 인간중심의 정신으로 법의 바벨탑을 세우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는 인간집단의 힘으로 인간세상을 지배하자는 정신인 것이다. 그래서 흩어지는 것을 막고 하나를 이루자는 정신, ‘뉴 에이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자는 운동인 것이다. 종교를 하나로, 국가를 하나로, 인종을 하나로, 의식을 하나로 가자는 것이 바로 뉴 에이지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세계에서는 무엇이 먼저 사라지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근본을 유지해 주는 심성(心性), 마음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의 마음에 양분인 ‘감사함’과 ‘죄송함’의 마음을 차단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비인간화, AI(인공지능인)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 첫 번째의 현상이 무엇인 줄 아는가? 낙태허용인 것이다. 출산 전에 태중에 아기는 아직 인간이 아니며, 장기의 하나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인간에게는 어찌 부모에게 고마움이 있겠는가? 단지 ‘행운아’ 일뿐이라고 어떤 미국인 학생이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다고 할꼬? 어찌 죄송하다고 할까? 역시 조선 오백 년의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아로 태어나면 산에 버렸다는 야화(野話)가 있다. 정말 조선의 역사를 읽어보면, 정상적인 인간들만이 있다. 장애인이나 왼손잡이 등은 멸시를 받거나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을 나는 적실하게 이해를 한다. 왼손잡이였던 아이를 끝까지 오른손잡이로 만들려고 얼마나 괴롭히고 철저히 단속해 결국은 글을 쓸 때나 식사할 때만은 오른손잡이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에 들은 말은 왼손잡이는 비정상적인 인간취급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제 알겠는가? 인간의 마음이 감사함과 죄송함의 양분을 먹어야 만이 선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는데, 그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 은혜로 감사하는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살리는 것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데살로니가전서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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