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기 이것을 하리라.」(히 6:1,2,3)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분명하도다.」(히 7:14,15)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나니,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9)
~~~~~~~~~~~~ Bible ~~~~~~~~~~~~~
"Only Jesus is a better hope, because He will take us go near to God."
'오직 예수만이 더 나은 소망이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직 인생관이 없는 아이들은 사는 이유를 알지 못할지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할 필요성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성장하면 사춘기를 맞는다. 그때부터 인간은 이유를 묻기 시작하는 갈등의 시기를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춘기엔 이성을 알아가는 시기라고 말이다. 정말 그럴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이성을 알고자 반항하는 걸까? 그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인간의 나약함을 알게 된다.
그걸 아는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첫아들인 가인이 둘째 아들인 아벨을 돌로 쳐 죽인 후에 아담과 이브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 상처를 치유해 주시려고 하나님은 셋째 아들을 허락했다. 그 셋째 아들의 이름을 아담은 ‘에노스’(Enosh)라고 이름을 불렀다. 왜 아담은 그렇게 셋째 아들의 이름을 불렀을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에노스’란 뜻은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인들(문명에 길들여진 자들)은 이렇게 의문을 말한다.
‘어떻게 사람들이라니? 그 당시엔 아담의 가족뿐인데?’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엔 아담의 가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의심하고 다른 이념과 사상을 믿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사실로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중에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노아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여호와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한 세대에는 이러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그들은 여호와를 알고 있으나 의지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둘째는 그들은 하늘의 아들들과 경쟁을 했을 것이다. 인간의 딸들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아들들(아담의 후예들)과 하늘의 아들들(땅에 인간이 있기 전부터 있는 하늘의 아들들)이 서로 여자로 인해 탐욕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즉 약 천오백 년의 인간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음란이 가득했었던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인간을 창조하신 여호와는 후회하게 되어 이 땅에 인간만이 아니라 호흡하는 모든 생물을 멸하기로 하셨다. 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을 멸하시려고 했을까? 인간이 타락했는데 말이다. 오늘날에, 소돔 고모라의 멸망이나 폼페이 섬의 멸망이나, 그리고 지금의 성 혼란의 현상, 이성이 아닌 신체적인 성의 다양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반추하게 된다.
노아홍수 이전의 음란함이 어떠했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하늘의 아들들과 인간세계를 분리해 놓으셨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음란의 악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상상을 초월하는 행위들이 범람했다는 것이다. 한 예를 든다면, 호흡하는 모든 동물들과도 음란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몸에 문신도 했을 것이고, 동성욕망도 했을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그 탐욕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노아의 세 아들로 좇아 온 땅에 백성이 퍼지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세 아들 중에 함에서 놀라운 면을 보게 된다.
함은 아비 노아의 나체를 보았던 것이었다고 한다. 무엇을 보았을까?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창 9:23)」
그러므로 노아홍수 이후의 인간들에게도 결코 음란의 탐욕에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의 열매를 먹고 제일 먼저 알게 된 것이 무엇이겠는가? 벌거벗었음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여호와는 그들에게 양가죽을 취하여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던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인간의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어디서 찾겠는가? 무엇을 찾겠는가?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궁극적으로 탐욕인 것이다. 그것을 철학자들은 이렇게 정리를 한다. 권력의 탐욕, 재물의 탐욕, 쾌락의 탐욕, 등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모두는 한 곳을 향하게 만든다. 즉 성적탐욕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명한 성인들이 등장하게 됨으로써, 보다 바람직한 인간세계를 이끌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집단을 다스리는 해법으로써 채찍(법)과 당근(종교)으로 인간들을 다스리는 지혜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지식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인간이 둘 이상 모이면 법이 필요하고, 인간의 본성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역사에는 권력(법)과 종교의 갈등이 있었다. 그러면서 법은 현실적인 것이며, 종교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이분법적 해석을 했다. 그렇다고 서로 충돌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 인간의 존재,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런 인간의 세계관은 권력(법)과 신앙(종교)의 양분을 받음으로써, 인간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고 만들어져서 보편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인생관에는 항상 인간의 탐욕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갈등과 불안에서 자유 할 수가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인간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이미 아신 하나님은 한 민족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인 것이다.
왜 하나님은 한 민족을 세우려고 하셨을까? 앞에서 이야기한 인간세계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은 불안과 갈등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은 무의미 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인류는 노아의 홍수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래서 영웅 니므롯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또한 국가관에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대국일수록 니므롯의 사상을 상징하는 탑을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니므롯의 사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의 심판에 대한 도전으로써 인간들이 하나가 되는 길, 즉 인본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거름이 되는 이념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다. 그 대표적인 이념을 들면, 진화론의 이념이다. 그 외에는 산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나타났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다양한 이념과 사상에 의해 인간들의 세계관이 교육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세계관이 구축되어 감에는 창조자의 존재를 배척하고 여호와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사상들이 인간세계를 지배하여가는 것을 아신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하여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참 인간관과 국가관을 깨우치려고 하셨으며, 타락하는 인간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던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 핵심은 인간의 갈등과 불안을 자극하여 인간세계를 지배하고, 반면 다양한 이념과 사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하거나 인간의 창조물로 인식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어두운 세계관에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절망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하나님의 뜻이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민족을 이루기 전에 하나님의 개입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뜻으로 멜기세덱이 등장하게 된다.
여러 임금들을 쳐서 죽이고 돌아온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의 일을 받치게 된다. 그것이 이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이룬 유대민족에서도 모세를 통해 대제사장을 레위 족속 가운데에서 세우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레위 족속이 아닌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예수는 멜기세덱의 대제사장의 직분으로 오셨던 것이다.
그럼 대제사장의 직분은 무엇일까?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하셨다. 그리고 레위 족속을 따라 세운 제사장도 역시 하나님의 정한 사람이란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라고 했다.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세운 자란 것이다. 그러면 제사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을 비는 자, 의의 왕, 살렘의 왕, 평강의 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끝임 없이 개입하고 계심과 섭리하고 계시며, 축복을 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니,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나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9)」
절망과 불안 중에 사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태초부터 뜻을 세우시고 한 민족을 세워 증거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 좋은 소망,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더 좋은 소망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Only Jesus is a better hope, because He will take us go to God.」
<추신>
1)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2) 술 취함과 흡연과 마약중독과 성욕망의 공통점은 불안과 두려움에 망각을 하게 해주지요.
3) 왜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참 소망이 없기 때문이지요.
4)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진리를 아는 것이지요.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진리를 알라. 그리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5) 진리는 무엇인가요? 참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창조자 하나님이 창조하였다는 진실을 알 때, 삶의 이유를 알고, 참 소망을 얻어지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