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소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서는 눈앞에 책들을 체크하듯이 바라보면서 커피를 유유히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소녀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는 그동안 공부해왔던 물리책과 노트를 하나하나 꺼내어 놓고는 내용들을 자세히 흩어보고 있었다.
그동안 공부했던 물리노트를 열었다. 그리고 소녀는 차근차근 유체역학에 대한 내용들을 살피고 있었다. 소녀는 유체역학에서의 기본 공리는 ‘질량의 보존법칙’과 ‘운동량 보존법칙’과 ‘에너지 보존법칙’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소녀는 보존의 개념을 태초에 창조자가 천지를 창조할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라고 해석을 하였다. 즉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녀는 받아들였다.
또한 소녀는 지구를 둘러싼 공기, 즉 대기에 대해서도 보존된다고 재해석을 하였다. 만일 대기의 양이 보존되지 않는다면, 지구의 모든 생물들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지구의 생명들이 크게 어려움이 없이 살아왔다는 것은 대기의 양이 일정하기 때문이라고 소녀는 생각을 정리했다.
소녀는 파스칼의 원리란 무엇인가에서 밀폐된 유체의 일부분에서 압력의 변화가 생기면, 유체의 모든 부분에서도 같은 크기의 압력의 변화가 전달된다는 것을 이해를 하였다. 그렇다면, 밀폐된 지구의 대기권의 내에서도 압력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지구의 대기권 내에 모든 부분에서도 같은 크기의 압력의 변화가 영향을 주게 된다고 소녀는 재해석을 하였다.
소녀는 대기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구의 둘레에 쌓여있는 공기(대기)가 지구의 중력을 받아서 지상에 나타는 현상을 압력이라 말한다고 이해를 하였다.
그리고 대기압은 장소와 기상(온도)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소녀는 바닷가의 대기압과 산에서의 대기압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여름과 겨울, 즉 대기온도에 따라서도 대기압은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소녀는 여름에는 하늘에 구름이 낮은 이유와 겨울에는 하늘에 구름이 높아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한 소녀는 바닷가에 대기압은 어디서나 일정하다는 것으로 재해석을 하였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바닷가의 대기압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기온이 낮아지는 이유를,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압력을 적게 받아 팽창되므로 기온이 낮아진다. 반면에 지표에는 공기의 무게로 인해 아래 공기가 압력을 받아 수축됨으로 기온이 높아진다. 그래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공기의 열원은 지표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소녀는 기압과 온도에 대해서도 반비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소녀는 지표면보다는 지상의 대기압이 작아진다는 것과 대기압이 작아지면 대기(공기)의 운동이 활발해진다고 정리하였다. 따라서 지면보다는 지상에서의 바람이 더 세게 불고, 바람의 이동도 활발하다는 것을 알았다.
소녀는 지구의 대기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생각에 깊이 빠져있었다. 이러한 지구의 대기변화에 대해서 소녀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깊이 묵상을 하였다.
소녀는 노아의 나이가 육백세 되는 해에 이월 십칠일에 땅에 깊은 샘이 열리고, 하늘의 문이 열려서 사십일 동안을 비가 내리고 솟아나서 지면위에 물이 넘쳐났고, 백오십일 동안을 그대로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창궐했던 물이 백오십일 동안에 줄어들어 노아의 나이가 육백일 년 첫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걷히고, 둘째 달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다고 했다.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니,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다시 이렇게 말하셨다.
“땅이 있는 동안에는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으며, 추위와 더위가 있겠고, 여름과 겨울이 있으며,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함께한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며, 다시는 땅을 멸하는 홍수가 있지 아니하겠다.”
그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고는 그 증표로써 무지개를 보이셨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으니,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라.”
소녀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면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유체역학에서의 대기압에 대한 원리를 깊이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소녀는 홍수 이전에 대기와 이후의 대기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계절의 변화가 있고, 춥고 더운 이유를 물리학에서는 지구의 축이 기울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홍수 이전에는 비가 오는 일도 없었으며, 춥고 더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구의 회전축은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소녀는 홍수 이전에는 하늘에 궁창에는 물이 층을 이루어졌으므로 인해 대기의 압력도 역시 홍수 이후보다는 높았을 것이므로 대기의 변화나 바람의 변화가 별로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소녀는 생각을 하였다.
여기서 소녀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의 하늘에 구름들이 일정한 높이에 떠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구름들이 여름과 겨울에는 떠있는 높이가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소녀는 홍수 이전에는 궁창 위에 물이 있던 곳이 바로 구름들이 있는 부분이라고 깨달았다. 즉 그 당시에 대기압이 지탱하여 주었다고 소녀는 깨달았다.
이러한 물리적인 현상을 이해하면서 소녀는 더욱 하나님의 세계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소라섬 소녀이야기 2편에서>
소녀의 깨달음에서 놀라움을 느낀다. 어찌 소녀는 그렇게 어려운 물리학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이해를 잘 할 수가 있었을까? 요즘에 대부분의 학생들이나 어른들은 물리학이라고 하면 무조건 거부하면서 어려운 학문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것도 물리학을 통해서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결해서 이해하였다는 것에서 더욱 놀랍지 않는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소녀의 이해력이 어떤 힘에서 나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대체로 일반사람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 있어서 다양한 지식과 문화에 의해 더 빨리 이해하지 않겠는가 하지 않겠나?
하물며, 지능능력에 대한 아이큐(IQ) 검사를 해보면, 도시에 사는 학생들이 훨씬 높은 아이큐를 차지하지 않던가? 대부분 어른들은 그렇게 말한다. 역시 도시에 아이들이 시골에 아이들보다 지능이 높으니 더 똑똑하지 않겠는가 하며 당연하듯이 받아들인다. 요즘에는 컴퓨터를 잘한다든가, 전자게임을 잘한다든가 하면 머리가 좋다거나 좋아진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한때 학교 주변에 전자오락실(Gameroom)이 많았었던 때가 있었다. 이처럼 현대인의 지능발달은 인터넷의 정보에 따라 진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딴섬, 소라섬에 홀로 지낸 소녀는 어찌해서 이해능력이 좋은 것일까?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보통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른다. 이들은 입력된 것에서 기억해 내는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소녀는 어릴 적부터 주변에 섬에 있는 자연을 이해하는 생활을 해왔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녀는 어떤 지식도 암기하기보다는 이해하는 것에서 지식을 습득해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소녀의 모습을 가장 즐거이 바라보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다. 그렇게 소녀는 보이는 것들이나 어떤 현상에 대해서 어떤 정보나 지식을 받은 적이 없었고, 스스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 소녀는 미국에 시카고대학에 물리학을 공부하면서도 맹목적으로 암기하거나 외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인 것이다.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간은 그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가치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을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이 계획하는 것이 어릴 적부터 악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악하도록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즉 스스로 선택하거나 판단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잘 따르는 아이들을 모범적이라고 칭찬하거나 인간됨이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을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해주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던 것이었다. 너무나 소녀는 소라섬에서 자유롭게 자라난 것이었다. 그러니 소녀는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명확하게 이해와 판단하는 건강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이걸 아는가? 아직 세상 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아이에게서 놀라운 현명함을 보겠는가? 걸음을 시작하는 아기를 보아라! 계단을 내려가려는 아기의 행동을 보아라!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아라! 얼마나 지혜로운지를 말이다. 이처럼 자유롭게 스스로 이해하고 행동하도록 보아만 준다면, 아이들은 매우 현명한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전에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의식을, 행동을, 생활을 제한하거나 통제하거나 형식을 주입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자칭 교육이라고 말한다.
이미 한국의 가정에는 조선시대처럼 신분사회를 유지하면서 어린 자녀들에게 신분의식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의 신분, 출생순의 신분 그리고 친척관계에서까지 철저히 신분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하물며, 한글언어(세종이 만든 한글을 양반제도에 의해 변질된 언어차별화, 존대어와 쌍말)에까지 아이들에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분을 철저히 구분 짓게 하고 있다.
그러나 소라섬에서 자라난 소녀는 얼마나 자유롭게 성장했기에 그토록 놀라운 이해능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소녀는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보존의 법칙의 의미를 창조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임을 말이다. 즉 질량보존법칙, 운동량보존법칙, 에너지보존법칙, 등을 얼마나 놀라운 이해였는가?
물리학자들에서도 이 세 보존법칙은 불변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창조세계를 보존의 법칙으로 세웠다는 사실에 놀랍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