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5. 왜 겸손해야 하나?

[知言]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105. 왜 겸손해야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론]

우리는 왜 겸손해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리스도를 그 기준으로 제시한다. 유명한 구절인 만큼 암기해 두는 것이 좋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나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어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 2: 6~8)


숨소리도 안 나게 일하셨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론이다. 예수님의 사목 방법론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 대부분을 산속이나 외진 곳에 가서 하셨다. 열둘 제자를 뽑으실 때도 산속에 가서 기도하면서 뽑으셨다. 마지막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혼자 깊이 기도하셨다. 공동생활 직전에도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기도하셨다.

하지만 우리의 방법론은 다르다. 작은 일 하나 하면서도 앞서기를 좋아한다. 이런 행동은 예수님의 방법론과 거리가 멀다. 경험상 큰소리 내며 하는 행동 중 대부분은 하나님의 일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일은 조용히 진행된다. 중요한 일일수록 소리를 낮추어야 한다.

<거꾸로 읽는 신약성경/ 정영식 지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며 예산과 규모를 거대하게 갖춰야 하는 줄로 안다. 결국은 인간들의 생각과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빙자한 사업들 … 많은 무리가 몰려와야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듯 생각한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일과는 먼 짓들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예수님도 역시 조용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 시장이나 광야에서 외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  ~~~~~~~~~~~~


책상을 뒤적이며 정리하던 중에 눈에 띈 엽서의 글을 다시 읽어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아니하셨던 그분, 예수 그리스도, 황혼에 종종 먼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나이에 더욱 그분의 은혜를 살피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찌 보면, 내 인생은 나 스스로 살아간 듯 생각했었으나, 그 자리에는 늘 주님이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하니 더욱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기 예수 탄생하던 날, 요셉과 마리아는 마땅한 숙소가 없어서 마구간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홀몸이 아닌 마리아에게는 최악의 입장이 된 것이 아닌가? 요즘에 어느 누가 임신한 몸을 위해 좋은 자리를 마련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성경에는 요셉도 마리아도 마구간에 지푸라기를 잠자리로 했어야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곳에 하늘에는 동방의 박사들을 이끌어온 별이 멈춰있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 별을 보고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을 발견하고 경배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밤 중 들에 있던 목동들까지 천사들의 소리를 듣고 찾아오지 않았는가? 비록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이지만 말이다. 그들로부터 탄생의 축하를 받았던 것이었다. 그런 아기 예수는 헤롯왕의 포악함을 피해 애굽으로 가고 나중에 나사로 마을에서 자랐던 시절에는 자신도 누구에게 드러내지 아니하고 청년에 될 때까지 목수의 부친 아래에서 자랐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에,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며, 요단강가에서 무리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청년 예수는 그에게 나아가 물세례를 받았을 때에, 예수는 하늘로 음성을 들었던 것이었으며,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 40일간 금식을 했다.

그 후에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머물면서 세례요한이 하던 것을 행하셨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예수는 하늘 복음,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을 했다. 이를 마태는 이렇게 썼다.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 드리운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마태 4:16)


그는, 예수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오직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살아가신 것이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그는 말씀을 전파하시면서 사람들의 모든 질병과 아픈 곳을 고쳐주셨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소문이 온 사마리아에 퍼졌고, 온갖 질병과 고통,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과 귀신 들린 자와 간질병과 중풍도 고쳐주셨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온 유대 땅에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오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셨던 것이었다. 그러하였기에 그를 유대인들은 천한 사람으로 여기거나 귀신 들린 자로 여기고,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이유를 만들어서 그를, 예수를 로마의 극형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까지 말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볼 때에, 또는 그의 가르치심에서도 깨달음은 곧 그의 겸손하심인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이렇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보라, 너희 왕이 너희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마태 21:5)


이처럼 그분은, 예수는 친히 자신의 겸손함을 나타내셨으며, 가르치셨던 것이었다. 그러면 그 겸손함에 의미를 얼마나 깨달아 알까? 또한 그의 제자들도 역시 예수의 겸손함을 따랐으며, 생애를 마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뭐라고 말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겸손함이 없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가? 특히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겸손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유를 아는가?

여기서 한 예를 소개한다면, 예수가 비유로 가르쳐주신, 탕자의 비유에서 깨닫게 된다. 자신의 몫인 재산을 아버지께 받아선 세상으로 나아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모두 잃고서 돼지들이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배를 채울 수 없어지자, 제정신이 들어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탕자의 모습에서 겸손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겸손함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게 되는데서 오는 것이다. 예수도 자신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보이시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근본이 하나인 것이다.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힘은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이었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시고 친히 그 길을 가셨던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도 예수의 길을 갔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겸손함과 온유함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멍에를 함께 지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금 은혜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