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인간이 세상살이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을 다스림일 것이다.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이 도(道)를 찾아 나선 학자도 많았고, 많은 대안들이 글로 전해왔다.
한편 철학이라는 학문으로까지 전개되면서 “인간은 무엇이냐?”라는 의문으로 접근하려고 상당히 애써왔다. 하지만 아무런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중에 인간을 다스리는 비결로 ‘중용(中庸)’이란 놀라운 의미를 찾아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나 인간의 희비극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데서 온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다스림에서 중요한 의미로 ‘중용’과 ‘인내’와 ‘온유’라는 것을 본질로 찾았다.
중용은 마음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상태로써,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분노하지도, 괴로워하지도 말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용은 인간의 수도의 결실에 지나지 않는다. 인내는 감정의 다스림이라 함이 더 타당하다. 화가 날 때에 참으라는 단순 이치인 셈이다. 체험을 통해서 인간은 인내를 터득하거나 배운다. 인생을 많이 살수록 인내의 필요성을 안다. 전통과 문화에서도 인내를 배운다.
그러나 온유는 수도로도, 체험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유는 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신의 은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온유함은 신의 성품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즉 인간사에 신의 뜻을 알고 순종한다는 것이다.
<엽서의 글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한 인생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중세전후에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영향을 받은 지성인들이 등장하면서 사상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솔로몬시대에서부터 열방의 제국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얻고자 찾아왔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매우 평화로웠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먼 나라의 왕들이나 대신들이 솔로몬(기원전 970년경)을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그 후 300년 정도 후에 석가모니(기원전 624년경) 등장하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기원전 470년 경) 등장하고, 노자와 공자(기원전 551~479년) 등장하였다. 그리고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서 더 많은 철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성인들에 의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원리와 본질에 대한 철학이 발전하고 사상과 이념의 파워가 커갔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상과 이념에 바탕을 두어 지도자가 힘을 얻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이념주의가 등장하면서 국가관의 심벌(symbol)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국제사회가 이러한 이념사상의 힘(power), 즉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이 현대사회에서는 중심이 되어 정치,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상 정신은 결국은 고대철학자 소크라테스에서 중세, 근대에 이르러 사상가, 철학인들에 의해 형성되어 통치뿌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런 사상이나 이념이나 철학 등에서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공통점을 두고 있다고 보게 된다. 물론 현대종교도 역시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현시대에 국제정세나 권력자들(왕들)은 사상(思想)과 종교(宗敎)의 이념들로써 제왕적 권세를 움직이고 있다고 보아진다. 예를 들면, 중동의 종교적 배경과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미국과 유럽 등에서 이념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 인간은 갈등과 번민에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인들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도 노자가 말한 길(道)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기술문명의 혜택에 의존하며, 갈등을 망각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예를 들면, 대중음악, 전자게임, 인터넷 정보, 등. 스마트폰(smartphone)이나 태블릿 피시(Tablet PC) 등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보게 된다.
이처럼 문명과 이념의 환경 속에서는 인간의 갈등과 불안을 해소하려고 하여도 인간의 본질, 죄의 속성에서 자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문명의 삶에서는 도저히 온유와 인내와 중용이란 찾아볼 수가 없고, 무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더욱 불안과 갈등을 잊으려고 인간의 본질을 알기보다는 이성을 망각 또는 상실하는 길을 쫓는다.
그래도 아직 이성을 의식하는 인간들은 여전히 인내와 중용 그리고 온유에 대해 갈망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아직도 종교는 숨을 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들이 존속되는 이유는 이런 인내와 온유와 중용을 찾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나 사상가나 그들도 역시 인간인지라 번민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문명의 혜택을 즐기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종교, 신철학, 신예술, 신문화 등이 새록새록 등장할 때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추종하며 열광을 하는 것을 흔히 보고 있지 않는가?
그래도 여전히 인간의 인내와 중용과 온유는 삶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럼 인내와 중용에는 사상과 이념의 지식으로 터득하고 훈련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인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그런 강연에 솔깃하고 찾아다닌다. 하지만 온유는 그런 사상과 이념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즉 온유함은 인내와 중용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을 먼저 말해둔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서 온유에 대하여 찾아보며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주께서 내게 주의 구원의 방패를 주셨으니,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였다.」(사무엘하 22:36)
「그러나 온유한 사람들은 땅을 유산으로 얻을 것이고, 큰 평화를 누리며 기뻐할 것이다.」(시편 37:11)
「온유한 대답은 진노를 가라앉히지만, 과격한 말은 분노를 일으킨다.」(잠언 15:1)
「이 땅의 모든 온유한 사람들아, 여호와를 찾으라. 그분의 공의를 행한 사람아, 의를 구하라. 온유함을 구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혹시 너희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스바냐 2:3)
「온유한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마태 5:5)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태양이 높은 곳에 떠올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우리에게 빛을 비춰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누가 1:78)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 곧 거룩하고 사랑하심을 받은 사람들같이 긍휼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으라.」(골로새 3:1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 버리고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말씀은 능히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야고보 1:21)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선한 행실을 통해 지혜에서 나오는 온유함으로 자기의 행위를 보이라.」(야고보 3:13)
이상 성경에서 보여주는 온유함이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온유함에는 긍휼함과 진실함이 있으며, 또한 선한 양심이 있어서 인간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고 사랑하는 힘이 있습니다. 대체로 선하다고 하는 사람도 때때로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온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온유함은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온유함을 품으며, 어떤 고난도 견디어내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인내와 중용은 훈련을 통해서, 또는 인지하는 힘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온유함은 하나님의 성품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온유함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온유한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온유한 마음을 품었기에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을 보셔요. 그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바로 온유한 마음을 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 “진리를 알라. 그리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 8장 32절)
# 인내는 성격에 있으며, 중용은 의지에 있으며, 온유는 성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