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Ⅲ]
“희망은 항상 있습니다. 희망이 모두 사라지면 세상은 끝입니다. 절망의 어둠을 당신의 촛불 하나만으로 비출 생각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촛불을 하나씩 밝힌다면, 가장 어두운 밤이 가장 밝은 낮으로 변할 것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인간은 도저히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었습니다. 세상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빨리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생을 일찌감치 포기한 채 약삭빠르고, 파렴치하고, 비열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상황입니다. 이 세상에 성공한 사람 한 명에, 실패한 사람 천 명의 비율입니다. 그러니 인구가 증가해도 그 비율은 조금도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 오그만디노 지음>
세상의 성공은 상대적이다. 열 명 중에 한 명이 성공했다면, 아홉 명은 실패를 의미한다. 즉 아홉의 몫이 한 명에게 집중된 결과이다. 부자도 마찬가지이다. 20%의 부자들은 80%의 가난한 자의 것을 착취해야만 한다. 인구증가이든, 문명발달이든, 상대적 문화와 행복을 극대화할 뿐이다.
비극은 상대적인 세상의 배설물인 것이다. 그리고 절망은 악의 화살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신다. 그래서 ‘너는 나그네’라고 하셨다. 희망의 줄을 타는 나그네 말이다.
<회고(回顧)>
참으로 그렇다.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인간세상은 반드시 선악의 저울로 끝없이 저울질하는 세상인 것이다.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울질은 시작되고, 그 물살에 휩쓸려가며 끝없이 상대적인 세상을 익혀가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발을 땅 위에 내리고 첫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놀라운 말을 노아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8장 21절)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인간들이 어떤 사상이나 이념에 의해 이끌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에는 나라와 같은 권력중심의 집단체제는 없었을 것이고, 오직 각자의 행위대로 편만한 대지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높고 낮음의 지형으로 크게 이루어져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에야 지형이 변하여 높고 낮은 곳이 나타났으며, 깊은 골짜기와 계곡 등이 발생했을 것이다.
이처럼 변형된 지형처럼 인간세상도 높고 낮은 존재로, 또는 지형과 인간들에게 경계선을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나라가 구별되고, 인종이 나누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 인간세상은 지구라는 한 영역에서 영토를 구별하고, 인간을 신분으로 구별하고, 이러한 선악의 잣대로 인간을 지배하며, 뱀이 말했듯이 서로 상대적 관계를 통해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선악을 저울질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신다.」(창세기 3장 5절)
이러한 세상, 인간이 선악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얼마나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가는지 아는가?
이러한 인간들이 나라를 만들고,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그들의 통치수단으로 법을 만들어, 그 법을 최고의 권위로 삼아 어떤 누구도 그 법을 문제 삼지 못하게 하고 있지 않는가? 마치 권력의 법으로써, 최고의 존엄의 자리에 올려놓고는 뭇 인간들, 피지배자들, 이들로 복종케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러한 국법, 민법 등이 완전한 제도로, 마치 신의 법인 양, 최고의 존엄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합법적으로 인간들을 다스린다고 하고 있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법(法), 예(禮)와 교육(敎育)이란 범주 안에서 인간들은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살아가는 듯이 보일 뿐이다.
그런 인간사회 속에서, 인간들은 서로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비교하고, 구별하고, 차별하고, 계층을 나누며, 그 울타리 안에서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경쟁의식을 안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태중에서 나온 순간부터 그러한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부유한 가정과 빈곤한 가정의 상대적인 환경, 지식인과 무식인의 상대적인 환경, 사회적 계층의 상대적인 환경 등등이 인간들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다.
이처럼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찾아오는 희망과 절망은 쟁취해야만 되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희망도 절망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도 상대적인 잣대로 판단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조건에 따라 어떠한 것도 이원론적인 - 항상 대립하는 두 가지의 것, 경우의 원리로써 사고하는 의식에서 자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탈북 한 여성의 말에서, 북한에는 모두가 못 먹고, 못 사니, 가난하다는 의식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함에 원망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 보니, 북한 사람보다 훨씬 잘 살고 있으면서도 가난에 대한 열등감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근로자와 고용주의 관계, 노동직과 사무직 등의 구별(차별)에 의해 불공정성과 불평등성을 주장하며 쟁투하는 현상들이 모두 상대적인 관계로 저울질하여 비합법적인 수단을 정당화하는 사회분쟁이 끝없이 발생하는 이유도 역시 선악의 저울질에서 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세상에는 상대적으로 성공과 실패를,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함으로써, 희망과 절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인 사고를 벗어나는 길을 예수는 따르는 무리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즉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명확하게 하신 말씀이 있는데, 즉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한 14:6)이라고 말했다.
이는 이 세상은 올바른 길도, 참 진리도, 진정한 생명이 없는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즉 이 세상의 인생은 솔로몬이 말했듯이 헛되고 헛되며 헛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인생에는 절망뿐이라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바라는 희망들, 성공이나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제의 불행이 오늘에 행복이 되기도 하고, 어제의 성공이 오늘에 패망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사(世上事)인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항상 있다고 말할 수가 있으며, 절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아담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첫째로는 사망, 반드시 죽음이 주는 두려움인 것이다. 둘째로는 선악의 지식에 의한 고통인 것이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철인들의 말들, 즉 덧없는 인생이라는 뜻이 어찌해서 나왔을까? 솔로몬의 시대에는 전국에 왕들이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국제관계가 매우 평화로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그렇지 않고는 먼 나라에서 왕들이 어찌 솔로몬에게 찾아올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왕들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배우려고 찾아올 수가 있었겠는가? 오늘날에 이차대전 이후에 국제적으로 큰 분쟁이 없이 국제적 관계를 이루어갈 수 있었던 것도 솔로몬 시대와 유사한 평화적이었다고 비교할 수가 있지 않을까? 그런 평화로운 시대에, 솔로몬이 지혜서의 첫 글에서 말한 내용을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이 구절이 모든 세상사에 대한 명확한 명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도 ‘희망은 항상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 아닐까? 이 말에는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향한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타락한 인간세상을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을 애굽(이집트)에 불러들이므로, 요셉의 부친인 야곱이 바로 왕 앞에 서니, 바로가 야곱에 나이를 물으니, 야곱이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 내 나이가 얼마 못되며,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창세기 47:9)
그렇다. 야곱의 말대로 인간의 인생사는 나그네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인가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던 것은 매우 깊은 가르침인 것이다.
이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의 삶이란 참 길을, 참 진리를, 참 생명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인생에서 절대 절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희망의 줄을 내려주시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계시기에 희망은 항상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나그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나그네 인생이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에 이르는 병’이란 책에서도 실존적 절망이라는 개념으로서, 절망하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죄에 속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진리를 아는 자, 진리를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절망이 인간을 구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희망의 줄을 하나님이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는 공중에 새나 들에 풀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작은 희망의 촛불이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촛불을 하나씩 밝힌다면, 어둠이 밝은 낮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