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

[독서와 생각]

by trustwons


66.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


다른 사람을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나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 바로 자신을 분리시키는 훈련이며, 자신의 확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변화도 이와 더불어 생기는 것이다. … 좋은 부모가 되는 데에도 필수적으로 적용된다. 자신을 분리하고 확대하는 것은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에도 적용된다. 그들의 건전한 요구들에 응답해 주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그런 변화에 따른 고통을 달갑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부모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계속해서 자라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는 변하게 마련이며, 우리는 마땅히 그들과 함께 변하고 자라야 할 의무가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M. 스캇 펙 지음>



도량이 넓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지성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상당히 이해를 잘하는 편이라고 자칭 말한다. 하지만 남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만 한다. 편견(偏見)과 이견(異見)과 오해(誤解)는 마음을 비우지 못한 데서 온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객관적인 태도를 말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초기화 상태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즉 태도를 바꿔야 한다. 주님 맞이하듯이 자신 안에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再悔-다시 뉘우치다]

그렇구나! 이해한다는 의미로써, 이해(理解)는 남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자신을 풀어, 열어서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상대가 이런저런 말을 할 때에 자신의 식견(識見)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한다면,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방안을 깨끗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을 열기 위해 정리하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님도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아니, 하늘 아버지도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보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아실까? 아담이 죄를 지은 때에도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에서 예수가 올 것을 예언해 주셨고, 노아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받음에서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을 산채로 바칠 때에도, 모세도, 다윗도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그렇게 ‘메시아’를 말씀하셨는데도, 유대인들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지.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목숨을 내놓으셨지.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움으로서 상대방이 믿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도, 얼마든지 사람을 변화시켜서라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데도 말이야. 그리하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셨지. 그것을 예수님은 탕자의 이야기로 말해준 거야. 그런데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해석을 하지. ‘돌아온 탕자’에 초점을 맞춰, 신도들에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강요하고 여럿 제도를 만들어 회개하라고 강요하지. 그러다 보니, 형식적인 회개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외식하는 신앙인이 되고… 그래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비유를 들어서 말했지. 양과 염소의 비유 말이야. 그뿐만 아니지. 알곡과 쭉정이의 비유도 있지. 이러한 모습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진실함이냐, 진실하지 않음이냐에 있는 것이지. 세상의 지식들은 대부분이 거짓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알까? 대표적인 이념이, 진화론적 이념들이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저자가 말함에 있어서 얼마나 공감이 되는지 모른다.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이해해라 하고 명령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이미 주신, 인격에 있는 것이지. 즉 우리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이지. 사람을 함부로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품에 상처를 주는 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세상을 보라! 가장 더러운 곳이 어딜까? 정치하는 곳과 장사하는 곳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절대로 속마음을 보이면 안 된다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고 하는 이런 말들은 모두 자신보다는 상대를 먼저 지배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세상의 왕들을 제일 먼저 심판하실 거라고 말하지 않는가? 다시 말하면, 세상의 왕들, 권력을 가진 자들, 이들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며,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동향에, 조선에 있어서, 겸손(謙遜)의 미덕(美德)이라는 말이 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남을 존중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겸손한 척하는 것을 많이 본다. 특히 배운 사람일수록, 권력을 가질수록, 입에 침 마르듯이 말하지 않는가? 사실 겸손한 사람은 그런 표현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리 수모를 당해도 말이다.

이처럼,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참된 이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어릴 적부터 세상 이념에 길들여져서 바른 이해를 하기 너무나 어렵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어떻게 알까? 신구약을 통달해야 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인본주의 신앙에서는 어떤 결실, 결과를 보여줘야만 인정받는다는 것에 깊이 빠져 있어서,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가식적인,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것이다. 종교의 제도가 많을수록 외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런 제도가 성령의 일을 막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러면 진리를 어떻게 알까? 첫째는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이야 말로 성경 전체를 요약해 주신 것이다. 기도문을 깨닫게 된다면 이미 주님을 영접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몰라도 기도문을 날마다 묵상한다면, 충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기도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무시하고, 오히려 사도신경(인간이 신학적으로 만든 문구)에는 매우 거룩하게 받는다. 사실 사도신경의 목적은 유대인을 핍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과 성경을 읽지 못하는 신도들에게 읽히게 했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세상적인 이념을 벗어내고 진리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야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Genesis(창세기) - 7장 1절 ~ 2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