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세는 사람은 잡초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한 머리로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꽃이면 꽃, 잡초면 잡초를 따로 셀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꽃을 세려면 우선 잡초 세는 일을 멈추어야 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세는 사람은 불행한 목록을 잊어야 한다. 사랑을 헤아리는 사람이 어찌 미움을 곁눈질할 수 있으며, 지금 누리고 있는 축복을 따져 보는 사람이 어찌 불평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원망의 한숨은 깃들 수 없는 일이다. 엇비슷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쓰레기 더미에도 기어이 꽃을 찾아 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장미꽃이 만발한 화원 속을 거닐면서도 늘 잡초만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사실 세상은 온통 장미꽃만 피는 화원도 아니고 잡초만 얽혀있는 가시밭만도 아니다. 때로는 섞여 있기도 하고, 때로는 따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어차피 세상은 어디나 잡초도 있고, 장미도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여기서 어떤 것을 더 많이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복과 불행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 2001년 5월호>
그렇지, 꽃을 세는 사람처럼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도 불행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잡초만 세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꽃을 세느냐 잡초를 세느냐 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 자체가 불행의 원인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보통 사람들은 항상 이런 이원론적 생각을 한다.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잘 사느냐 못 사느냐, 행복할까 불행할까 등등에 저울질을 하는 습관이 되었다. 거기다가 교육의 제도 속에서 철저하게 서열을 배우고, 오징어 게임처럼 도박을 하는 본능에 쉽게 젖어버린다.
이러한 모든 원인은 어디서 올까? 은혜의 동산, 에덴동산에 살고 있던 두 연인은 결국 언약의 상징인 선악의 나무에 열매를 먹음으로써 선악의 씨앗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첫 번째로는, 가인과 아벨의 선악이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창조자에 인정을 받기 위한 선악의 씨로 뿌림을 받았다. 인간은 선악의 열매를 먹어서 심중에 선악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은 언행으로써 선악의 열매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은 꽃을 세려고 한다. 이는 무슨 말일까? 꽃이 선하고 잡초가 악이란 말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에는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기 전에 품었던, 창조자와 동등함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다. 남보다 더 화려한 삶을 추구하려고 하고, 남을 지배하는 윗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곧 창조자와 동등한 자리에 있게 된다는 착각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초보다는 꽃을, 불행보다는 행복을, 실패보다는 성공을, 증오보다는 사랑을, 바라는 마음에서 잡초보다는 꽃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닐까? 꽃을 세든 잡초를 세든……. 그것에서 자신의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야 말로 창조자가 부여해준 자유의지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인간의 자유의지를 창조자는 간섭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도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이 참 진리를 알게 된다면, 그러한 이치를 명쾌히 깨닫고 마음에 평안과 더불어 감사가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꽃을 세든, 잡초를 세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