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글]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을 하게 되면, 부모의 자녀이든, 친구이든, 아는 사람이든, 그가 자살을 하였을 때 유가족이나 친구 또는 이웃은 심히 애통하게 된다.
이때에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유는, 자살한 사람에 대한 애정과 동정이 제일 먼저 온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자살한 유가족의 아픔도 마찬가지일 게다.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자살을 했어야 했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자살한 사람에 대한 고통은 바로 자살한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모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한다.
연예인이었던 최진실의 자살은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특히 그녀의 팬들은 더욱 슬퍼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의 남동생은 더욱 괴로워했다. 매우 가깝다던 남매간이었던 그녀가 자살한 것을 남동생은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누나의 괴로워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던 남동생은 누나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동생의 자살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살 유가족의 크나큰 아픔은 바로 이러한 자살한 사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마음인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치유의 독서를 하던 중에. 2012년 8월 13일>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가져온 서류들 중에 특히 눈에 들어오는 문서 하나가 있었다. 손에 들고 다시 읽어도 그때에 심정을 그대로였다. 오늘따라 누님과 산책하면서 나누던 대화 중에 최진실은 도원동교회에 다녔다던데 하면서 나눈 대화가 새롭게 잠든 마음을 깨우고 말았다.
직장을 은퇴한 후에 잠시 심야자살상담을 해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마포대교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을 한다는 뉴스에 가슴이 아려왔었던 심정을 생각해 본다. 멀리 전주에서까지 자살을 하려고 서울 마포대교를 향해 기차를 타고 올라와 깊은 밤에 마포대교에 서있던 한 여인이 생각이 난다. 다행히 설득이 되어 상담실로 모셔와 다음 날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일이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에는 자살이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관광처럼 마포대교를 찾아온다는 뉴스도 접하던 때였다. 하지만 오늘날이라고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자살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보도를 듣고 더욱 아픔 가슴을 쓸어내리지도 못하고 또 마음에 담는다. 왜일까? 가족도, 지인도, 이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자살을 시도해 본 사람만이 아는 심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살하는 사람은 결코 비겁해서도 아니다. 또는 비관해서도 아니다. 또는 무책임해서도 아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이 살고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런 지푸라기조차 보이지 않기에 물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자살이란 물살에 쓸려내려 갈 뿐이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살하기 직전에 누군가에게 마지막 호소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유명한 사람들 중에나, 사회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 중에는 유서도 없이 자살을 했다는 보도와 지나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진 듯이 자살하는 보도를 보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마음은 힘들고 괴로움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을 노리는 정치인이나 명인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