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한 마을처럼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려면 무척이나 혼란스러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세계와 다른 문화를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네 삶의 방식이 유일하고 필연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의문을 품지 않고, 질문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배운 삶의 가치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된다. 절대적이고 당연한 가치들만 존재하는 곳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사는 세상을 낯선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인생을 멋지게 설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한 마을이 되어가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즐기어라.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앨런 맥팔레인 지음>
젊은이들은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 크다. 그러면서 세상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를 더 두려워한다. 오히려 유행, 문화, 집단 속에 파묻히기를 원한다.
반면, 유대인들은 철저히「나그네 인생」을 인식하며 살아왔다. 국가도, 민족도 없이 흩어져 수백 년 동안 유랑생활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대인들은 다른 세계와 다른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얻었고, 야훼의 절대적 가치 속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신의 뜻을 발견하면서…….
현제 세계를 보아도,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급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서점에서나 언론에서 이미 많은 거론되어 왔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피상적으로만 여기고 흘려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다.
다시 엽서의 글을 읽어보면서 근심의 얼굴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지하고 인식하면서도 깊은 곳에서, 영혼에게까지는 울림이 일어나지 못하는지 안타까움에 애통하게 된다.
과거의 세계보다 현대의 세계가 얼마나 많은 지식으로 문화와 문명이 화려하게 이루어져 있어도 충분히 누리고 살아가기보다는 극히 일부분에만 종속되어 끌려가다시피 하는 모습에, 늙은이도 그러하고, 젊은이들도 그러함에 미워지도록 가슴이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인간 개개인의 존중을 의미하는 자유와 의지를 잃거나 상실하였거나 빼앗겼거나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성경에 니므롯의 바벨탑에서 깨달았고, 유대인의 출애굽에서 광야생활에서 깨달았고, 르네상스의 시대에 지식의 폭발에서도 깨달았다. 아인슈타인도 그렇게 말했다.
“보통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기억된 상념(想念)으로 생각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인간들은 생물학적 자유나 본능적 의지에 안주하면서 참다운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잃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는 외쳤던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은 돌아서라는 것이다. 깨어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상실된 것과 잃어버린 것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비틀어진 것이나 휜 것을 바로 한다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새롭게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릴리의 할아버지가 말해주었듯이, 너와 네가 사는 세상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아라는 것이다. 이는 너의 자유의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념(想念)과 통념(通念)에 메이지 말고 객관적인 시선,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아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유혹받기 쉬운 본능과 감성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유행병과 같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다. 여러 나라들을 여행할 때에는, 그 마을이나 그 세계에 대해서 낯선 시선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유대인들에게는 야곱이 애급 왕 앞에서 고백했듯이 나그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러할 때에 그 인생은 「자유의지」를 충분히 활용하며 누리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이 될 뿐만 아니라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자유의지가 살아있는 자만이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의 책은 사랑하는 손녀를 생각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너무 어린 손녀여서 활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