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흔히 유대교는 자비와 용서의 종교가 아니라 정의의 종교로 묘사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기를 바라거니와, 정의와 용서는 손을 잡고 나란히 가는 덕목이다.
저마다 복수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나, 어느 것도 단독으로 충분치 않다. 정의는 죄를 개인적인 보복행위(복수)로 앙갚음하지 않고 비개인적인 법적 절차(응보)에 따라 취급한다.
용서는 정의만으로는 피해자와 감정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한다. 증거를 구하고 평결을 내리고 형을 신고해도 피해자의 마음에는 고통과 슬픔의 앙금이 남아 있다.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와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 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 마이모니데스가 말하듯 다른 길은 없다.
<차이의 존중-문화 충돌을 넘어서/조너선 색스 지음>
유대 역사는 겉보기에는 복수의 연속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용서의 역사서이다. 일반적으로 유대교 하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고 정의의 종교인양 인식하고 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역사적 종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대하여 용서의 가르침인 것이다. 정의와 용서는 동전의 양면이라 해도 무방하다. 진정한 용서는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고, 용서는 정의의 열매인 것이다. 용서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며, 정의 없이 용서는 성립될 수가 없다. 복음은 용서의 진리이다. 정죄하는 예배는 진리가 아니다. 진정한 예배는 용서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용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인본주의 기독교 교리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선악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징벌을 받아서 에덴동산을 쫓겨났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도 남아선호(男兒選好) 사상에 바탕을 두어, 여자의 방정한 태도 때문에, 즉 여자가 먼저 선악의 열매를 먹고는 아담에게 줬다고 하는 논리로 여성을 죄악의 뿌리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여자에 대해 학대와 폭행을 정당화하는 데에 많은 공로를 세운 사상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중동지역인 것을……. 하지만 과거의 아시아에서도, 중국이나 조선에서도 여전히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주도적 영향을 행세하였다. 여기서는 용서는 절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정통성을 강요하면서 남존여비 사상을 합법화해온 역사였던 것이다. 여기엔 중세의 기독교인, 로마 기독교에서도 남존여비와 같은 제도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이후에 계몽시대에서는 서서히 여성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강여약(男强女弱)이라는 의식으로 남성우월과 여성열등으로 사회 곳곳에서 수많은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의식바탕에서 법과 도덕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용서보다는 정죄를 앞세운 인간 세상에서는 정복과 지배의 논리를 바탕으로 인간역사를 화법화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정의와 평화의 카드로 수많은 인명을 파괴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신선놀음으로 정의(正義), 대의(大義), 명분(名分), 덕목(德目) 등으로 용서란 그림자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도록 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관념으로 인간관계와 가족관계 그리고 국가관까지도 지배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는 인간 존엄의 회복보다는 생존의 유지가 지배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할지라도 성경에서는 용서를 말해주고 있다. 성경의 첫 사건은 에덴동산에서의 선악의 열매를 먹어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적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러할지라도 창조주는 곧바로 인간을 파멸하지 않았다. 천년이라는 인간의 수명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사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벌을 내린 것이 아니다. 언약의 파괴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에덴동산을 떠나게 됨으로써 있을 상황에 대한 예고였던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셨으며, 특히 인간의 고유한 존엄이 되는 자유와 의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용서하셨던 것이다.
또한 노아홍수 이후에 바벨탑 사건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해산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대속 죄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인류사에 확실한 증거로 삼음)하여 용서의 하나님으로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 즉 용서하라는 것이다. (마가 12:31)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 6:12)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 6:14,15)
이 말씀이 바로 성경의 핵심 복음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부터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 증거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인간역사에 못을 박아두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도 ‘서로 사랑하라’에서 용서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용서만이 관계의 회복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이전에 인간관계의 회복을 강조하신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의 어떤 죄악도 용서하시고 덮으시는 줄을 아시나요?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함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저는 죄를 짓을 때마다 깨닫습니다. 내 죄를 덮으시며 용서하심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뻔뻔스러워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