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시작할 때 이미 말한 것처럼, 누군가가 손해를 보아 고통을 당하거나 상처를 내고 부당하게 다룰지라도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해 고통을 받는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스스로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 지상의 어떤 거주자라도 주님 안에서 깨어있고 분별력 있는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영원한 불멸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깨어있고 분별력을 갖도록 하자. 그리고 모든 씁쓸한 일을 고귀한 마음으로 참아 견디어 내자. 우리의 주님이시고 영예와 권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안젤롬 그륀 지음>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다. 건강도, 재물도, 명예도, 신앙도 독존(獨尊)할 수 없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런 것들이 매우 중요하게 보인다. 하지만 성취 후에는 허탈과 공허가 소유한 것들을 삼켜버리게 된다. 신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만들었다. 홀로 있는 아담에게 여자를 주심도 그렇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들은 관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문제들은 자신 안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도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외부에서 오는 수많은 고통들을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은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외적 고통보다 내적 고통이 더 많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앙은 바로 내외적인 모든 고통들을 내적인 자기 신앙 안에서 해결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구원은 내적문제가 해결될 때에 이루어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요 8:32)는 복음도 바로 내적 해방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침략적 성격이 아니라 온유함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으며 살기에 '희로애락'이라는 사자성어에서도 인간의 고통이 담겨있지 않는가?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대중가요에서도 인생의 허무함을 담은 가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지 않았는가? 1921년 일제 강점기에 유행가였던 작가와 작곡 미상, 채규엽이 불렀다던 노래, ‘희망가’는 사춘기시절에 배고픔과 방황하던 때에, 부산바다를 바라보며, 들려 올라가는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즐겨 불렀었다. 가사는 이러하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이처럼 철부지에도, 뭣도 모르는 나이인데도 인생의 처량함과 가난의 절망에서 오는 고통스러움을 '희망가'의 노래로 달래곤 하였었다. 이때는 누구의 원망이나 상처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하니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이야 더하면 더하였지 않았을까?
그러나 대중가요인 ‘희망가’의 곡은 흑인영가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흑인들도 인생살이 고통 중에 위로의 노래로 불렀으리라 생각된다. 그럼 어떤 노래였을까?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이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형제여 서로 사랑하라 우리 서로 사랑하자. 사랑의 주님 계명 지켜 힘써서 사랑하자.”
어떤 이유였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외롭고 힘든 인생에 있어서 괴로워하는 고통스러움은 결국은 자기 자신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문명이 발달한 현대시대에서도 여전히 괴로움의 고통은 점점 가증될 뿐인 것 같았다. 그러니 젊은 세대들은 이미 눈치를 채고는 대중가요에서 위로를 찾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은 타인에 의해서든, 환경에 의해서든, 찾아오는 괴로움, 고통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내적 평화를 통해, 내적 해방과 자유를 통해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곧 온유함에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