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과학 스토리]
[창조와 과학 스토리]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 1장 1절)
케플러는 역시 『우주라고 일컫는 책』을 이해하려는 이 시도에서 역시 『꿈』이라는 제목의 달 여행 이야기를 써서 SF문학에서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놓았다.
이 『꿈』의 발단은 케플러가 튀빙겐 대학의 학생시절이던 1593년에 쓴 「달에 있는 관측자에게는 천문현상이 어떻게 보일까」라는 테마의 소논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플러처럼 천문이 재미있어 못 견뎌하는 대학생에게 있어서는, 달 위에서 관찰되는 천문현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 지구 위에서 관찰되는 천문현상을 바탕으로 여러 추론을 전개시켜 본다는 것은 더없이 흥미진진한 문제였을 것이 틀림없다.
이 논문에서 그는 달 위에서의 천문현상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태양의 운동이 빨라졌다 늦어졌다 하는 것, 행성의 운행은 지구 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불규칙하게 된다는 것 등에 대해서 이다.
이 때문에 달 위에 있는 관측자가 생각하는 천문체계는 매우 복잡한 것으로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은 달 자체의 운동을 고려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천문체계가 훨씬 더 간단해질 터인데도, 지구 위에 인간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달의 운동이, 달 위에 있는 관측자에게는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까지나 달이 정지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천문체계를 조립하게 된다.
지구 위의 인간에게는 지구의 운동이 느껴지지 않겠지만, 만약 그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지구의 운동을 고려에 넣는다면 우리의 천문체계는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하고 멋진 것으로 되지 않을까. 이러한 사실을 케플러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행성의 역행(力行)이라는 복잡한 현상을 이처럼 깔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며, 케플러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저 아름다운 천문체계였다.
그동안 케플러는 천문학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행성의 운행에 관한 「제1법칙」과 「제2법칙」을 발표했다. 그리고 1609년에는 다시 「달 위의 천문학」을 거론하게 되었다. 그것은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들어 처음으로 망원경으로 천체관측을 시작한 해였다. 망원경으로 달의 모습을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이 케플러의 달에 관한 관심을 새로이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달 위에서 볼 수 있는 천문현상에 관해서는, 자신의 천문학적 지식을 구사하여 충분히 논할 수가 있었다. 또 월면(月面) 위의 기상이라든가 지리학에 관해서도 망원경에 의해서 얻은 새로운 지식과 여러 가지 추리를 엮어가며 자세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케플러의 생존 중에는 끝내 『꿈』의 출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족들의 힘겨운 노력 끝에 그것이 빛을 보게 된 것은 1634년이었다.
케플러의 『꿈』이라는 이 달여행 이야기에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여 상상력에 의해서나마 어떻게든지 지식을 보급시켜 나가려는 그의 의욕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의 유모어와 비애(悲哀)도 섞여 있다. 본문은 때로 마술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주(註)」에는 놀라울 만큼 근대적인 견해가 나타나 있다. 영혼이 인간을 달로 데려다주는 도중에서의 인간의 호흡문제는 물에 적신 해면(海綿)을 콧구멍에 대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소박한 방법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을 지상으로부터 우주공간으로 발진시킬 때의 충격을 줄이기 위한 주의라든가, 달 표면에 연착륙을 시키는 배려 등도 기술되어 있어, 아직 근대과학이 성립되기 이전이던 그 시대에 어떻게 케플러가 이런 것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가 하고 신기할 정도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5장 14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가 적혀 있다. 케플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릴 적부터 허약한 몸으로 장학금을 받아 간신히 대학까지 진학했다. 그는 고생이 많았던 인생을 통해서 하느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소중히 다루며 「우주라고 일컫는 책」을 이해하려는 일념으로, 이것을 활용하고 늘려 나가 이토록 크게 키웠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와 기독교/와다나베 마사오 글/오진곤・손영수 역/전파과학사>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하늘의 별을 보고, 달을 보고는 수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케플러와 같은 가난한 소년에게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거의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특히 그 당시에는 밤하늘이 맑아서 수많은 별들과 은하수 등이 맨 눈으로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생각이 난다.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나 과학기술문명의 시대라고 하는 현재에나 인간의 지혜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문명의 생활과 문명에 대한 지식에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반문하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크게 둘로 나눠진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창조론적 관념과 진화론적 관념의 두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적 관념에서는 인류는 무지(제로)에서 시작되어 점차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진화설을 이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초기 인간은 무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지만, 창조설에서는 인간은 처음부터 지혜로웠다는 성경적 관념을 받아들임으로써 현재나 과거나 인간은 지혜로웠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의 그릇된 인식에서는 문화와 문명을 인간의 지혜의 척도로 보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는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산출된 산물 또는 집합체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를 누린다고 해서 반드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인간의 사고에 오류(誤謬)인 것이다. 반면에 문명을 누릴수록 인간의 지적활동은 저하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신체운동뿐만 아니라 뇌의 활동도 역시 꾸준히 사용할수록 쇠퇴하지 않으며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근육이 줄어들 듯이, 뇌운동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뇌세포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다’라는 의미는 그저 숨을 쉬거나 성장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살아있다는 것은 첫째로는 존재적 의미를 말하고, 다음은 역할(役割)이나 기능(특히 동물에는)이 함께 주어진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처럼 생각을 해왔다. 즉 숨 쉬는 우주를 말이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나 케플러는 「우주라고 하는 책」으로써 성경 다음으로 놀라운 책이라고 인지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지를 알듯이 우주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의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궁창에 별들을 내어서는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이 땅에 올 때에도 하늘에 별이 나타나는 징조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인간들은 하늘에 뜻을 두었으며, 하늘에서 지혜를 얻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케플러는 하늘에 별들을 관측할 정도의 시력이 좋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스승인 브라헤로부터 많은 천체의 자료들을 활용해 천체의 행성운동법칙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의 행성운동의 법칙은 첫째는 행성은 타원운동을 한다. 둘째는 행성의 타원운동에 있어서 공전면적은 일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케플러는 행성들의 운동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말했었다. 즉 등속운동이 아니라 가속운동, 운동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렇다. 우주뿐만 아니라 지상에서의 운동에서도 어떤 운동도 등속운동을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조건적 운동계를 통해서 등속운동을 설명을 했으며, 지상계에서는 일정한 운동을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함으로써 인간의 생활과 활동에 있어서 안정감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사실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가속도운동인 것이다. 그런데도 인지능력이 있는 인간들만은 가속운동은 불안감을 주고 등속운동은 안정감을 준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상에서의 물체나 생물들은 가속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속운동 속에서 익숙한 생활, 불편함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뉴턴의 운동 제일법칙에서 말하는 관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성은 정지되었든, 등속운동이든, 일정가속운동에서는 매우 놀라운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천체의 운동에서도 적용된다. 그 비밀은 창조자의 섭리 안에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뉴턴의 운동 제삼법칙인 작용과 반작용, 즉 힘의 평형상태, 힘들의 조화성, 힘의 균형 등에서 놀라운 창조자의 섭리를 발견할 수가 있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이 바로 놀라운 물질의 정수비, 우주의 조화론, 하모니인 것이다.
케플러의 이러한 놀라운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일반인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을 모르고, 기억된 것을 산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인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 사상에 뿌리를 내린 인간의 지식들인 것이다. 그런 지식들은 인간의 사고의 틀(관념화)을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그런 인간은 사고의 자유함을 모르고 이념 속에 갇혀있다. 그래서 예수는 “너희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부여해준 자유의지를 백 퍼센트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진리를 통해서 우주를 바라볼 때에 우주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가 살아있다는 것은 우주의 별들이 수학의 정수비, 조화, 진동함으로써 살아있는 것이다. 만유인력도 역시 수학의 정수비에 속하여 크고 작은 만물들에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과학의 진실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등대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거짓된 과학, 대표적으로 진화론, 진리보다는 혼돈을 야기 하며 인간을 두려움에 빠지게 할 뿐이다.
보라! 만유인력이 사라지면, 어찌될까? 우주와 만물이 다 풀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베드로는 마지막 날에를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베드로후서 3장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