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상대성 이론을 발표할 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단다. 이 편지에서 내가 인류에게 전하려는 바도 세상 사람들의 관념, 편견과 충돌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발전하여 내가 이 편지에서 말하는 바를 이해할 때까지, 수년에서 수십 년 나는 네가 이 편지들을 잘 간직했으면 한다. 우주에는 지극히 거대한 힘이 존재하는데, 과학은 아직도 그 힘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찾지 못했다. 그 힘은 만물을 주재하고, 우주 모든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며, 인류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이 우주의 힘은 바로 ‘사랑’이란다. 우주를 탐색할 때, 과학자들은 이 강력하고도 보이지 않는 힘을 소홀히 했단다. ‘사랑’은 그를 주고받는 사람을 밝혀 주는 빛이다. ‘사랑’은 서로 끌어당기게 하는 중력이다. ‘사랑’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물건을 몇 배나 좋게 하고, 인류가 무지와 이기심으로 소멸하지 않도록 하는 힘이다. ‘사랑’은 드러낼 수 있고, ‘사랑’은 나타날 수 있다.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살고 죽는다. ‘사랑’은 신이고, 신은 ‘사랑’이다.
이 힘은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고 생명에 의의를 부여해 준단다. 우리는 이 힘을 너무나 오랫동안 소홀히 해왔다. 이 우주에서 마음대로 운용할 수 없는 유일한 힘이기에, ‘사랑’을 두려워했다. 인류가 ‘사랑’을 이해하게 하려고 내 유명한 공식인 E=mc2에서 간단한 치환을 했단다.
우리가 ‘사랑’에 빛 속도의 제곱을 곱하여 얻어진 힘이 이 세상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사랑’은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힘이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우주의 힘들을 이용하고 통제하려고 해도, 이 힘들은 자신을 파괴하는 데에 쓰인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영양을 주는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만일 우리 인류가 계속해서 생존해 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의의를 찾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과 세상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다면, ‘사랑’이 유일한 답일 것이다! 현재 우리는 ‘사랑’의 폭탄을 제작해, 이 행성을 파괴하고 있는 증오와 이기심, 탐욕을 제거할 능력이 아직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사랑의 힘을 방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작지만 강력한 ‘사랑’의 엔진을 가지고 있단다.
딸아, 우리가 어떻게 이 우주의 힘을 주고받는지 배우면, 우리는 무소불능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사랑’에 대해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생명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내 모든 생각을 좀 더 일찍 표현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지금 사과하면 늦은 거겠지. 그러나 시간은 상대적이니, 네게 말해야겠구나. 너를 사랑하고 네게 고맙다. 너를 통해 생명의 최종 답안을 얻었으니 말이다.
< 아인슈타인은 ‘신’을 믿었을까?|작성자 곡두>
나에게 존경하는 과학자를 말하라면,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을 말할 수 있겠다. 그중에 한 분을 말하라면, 나는 아인슈타인을 말할 것이다. 여기에 소개한 과학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시다. 아니 철저한 신앙심을 가진 분들이시다. 그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신앙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것도 많은 비유에서 말이다. 그중에 하나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으나 저들에게는, 즉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 해당하는 자들을 말하며,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무엇이 철저한 신앙인지를 깨닫는 자들은 좋은 땅이라는 것이다.
파스칼이 「생각하는 갈대」에 대해 말했듯이, 파스칼은 철저한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허약한 몸인데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함으로써 결정적인 회심을 가졌으며, 무신론자들에게 기독교의 변증을 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팡세』의 변증론의 명상들이었던 것이다.
한편, 아인슈타인도 종교적 기독교로써 신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은 무신론자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사고세계는 일반사람들(세속 된 사람들=인본주의 이념에 길들여진)의 사고세계와는 너무나 달랐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매우 중요시했다. 그래서 그는 독일에 있을 때에 학교교련시간에 제식훈련으로 한 교관의 명령에 따라 발맞춰가는 일관된 행동에 회의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학교를 중퇴했다. 즉 그는 인간의 존엄성, 가치를 존중했었다. 무엇보다도 사고의 자율성, 인간의 유일한 자유의지를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의 성품, 사고세계는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의지를 지녔으며, 종교적인 제도 속에서의 신을 부정한 것이었던 것이다. 마치 제식훈련처럼 말이다.
그는 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놀라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발견한 에너지는 질량 ×광속의 제곱으로 표현한 것은 아마도 딸이 태어나기 전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상대성의 원리’라는 유명한 이론을 발표한 후에 우주의 원리를, 우주를 다스리는 에너지를 사랑의 질량 ×빛의 제곱으로 의미를 딸에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주라는 것은 천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구를 포함한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 뜻을 깨닫게 해 준 것은 바로 딸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딸에게 ‘너를 사랑한다. 네게 고맙다’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사실 하나 더 소개한다면,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에는 물질적 관계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물론 물질의 존재에는 만유인력이 있어야만 한다. 물질이 형성되고 유지되려면, 상호작용하는 힘(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인간적 관계에서도 인간의 생존에는 반드시 사랑의 힘, 즉 만유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도, 베드로도 말했다. 마지막 날에는 사랑이 식어지고 만물이 흩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이처럼 나는 아인슈타인과 뉴턴과 갈릴레이와 케플러는 좋아하는 이유를, 과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그 업적이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발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외친다. “진리를 알라!”라고 말이다. 진리를 알면 사람들의 영혼이 보인다. 어떤 사람인지를 보인다는 것이다. 진리를 알면 진실과 거짓이 보인다. 진리를 알면 우주의 이치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