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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전체주의와 객관성의 모순

[창조와 과학 스토리]

by trustwons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 1장 1절)


14. 전체주의와 객관성의 모순


특정한 전망의 객관적 진리를 절대적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단지 윤리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이유 때문에 오류로 증명된다. 그것은 과학적 객관성의 가능성이 제약되어 있음을 간과하는 오류로 증명된다. 그것은 과학적 객관성이 제약되어 있음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객관적 진리는 객관적 진리로 존속한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제약된 진리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인간이 원하는 대로 작동된다 하여 하나의 기계라고 볼 수 없으며, 인간은 특정한 관점에서 그의 모습대로 나타내며 그의 구매자 행동 양식에 있어 미리 계측할 수 있다 하여, 미리 형성된 사회적 행동 양식들의 집합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과학적 실증주의를 통하여 자연과 사회 속에 일정한 법칙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장엄한 모습으로 비판 이전의 시대로 복귀하는 것에 불과하며, 자연과 사회의 고정된 법칙을 결정하고자 하는 그의 입장은 본래 마르크스 자신이 발견하였던 인간과 자연의 역사적 중재 과정의 변증법을 간과함으로써 마르크스를 배반한다. 마르크시즘의 물질주의적 신앙과 과학에 대한 신앙은, 마르크스 자신이 계몽주의의 추상적 물질주의를 적절히 비판하였던 것처럼, 역사에 대하여 적대적이며 인간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과학적 진술들이 가능케 되는 조건들을 자기비판적으로 성찰할 때, 진리에 관하여, 다시 말하여 전체의 진리와 구원에 관하여, 참되고 건강한 인간 존재에 관하여 질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진리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고 우리가 이 질문을 직면할 때, 인간의 인간됨(Menschwerdung)이 일어난다. 세계의 구원과 파멸에 관한 이 질문의 지평 속에서 자유와 책임과 새로운 형성이 필연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참된 것은 전체적인 것이다.”라고 헤켈은 말하였는데, 전체적인 것은 구원이라 말할 수 있다.

<과학과 지혜-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하여/위르겐 몰트만 지음/ 김균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근대철학자인 데카르트(1596~1650)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유명해졌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Cogito, ergo sum] 그 시대에는 많은 사고하는 인간들, 철학자라 자칭하는 자들의 독점적인 세계였던 것이었다. 한창 실존주의에 눈이 뜨려고 하는 시점에서 말이다.

그 당시에는 교회중심주의였던 중세의 봉건제도, 봉건사회에서부터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현실적인 인간의 개성의 자유와 인간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커져갔으며,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중요시되는 시기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는 많은 예술과 문학이 탄생되었으며, 더불어 인간의 문명, 기술이 빠르게 발전해 가고 있었던 시대였던 것이었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이해지식이 넓어져 갔던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 데카르트는 놀라운 생각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존재감을 확장케 하였던 것이었다.

이 후로는 인간에 의한 사색, 철학이 눈부시게 발전해 가면서, 한편으로는 사고의 혼돈 속에서 철학적 논쟁과 사상적 논쟁이 인간사회 속에서 방황하며 진화해 가기 시작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적 지식이 정글을 이루면서 인간문명도 함께 발전해 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점점 인간사회는 철학과 과학이 우상화되어가면서 모든 인간세계에 근본적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어갔던 것이다. 즉 무조건적 신뢰와 긍정화로 자리를 잡게 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과 과학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게 될 정도로 인간세계를 지배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놀라운 지적 활동에 있어서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끝없는 비판과 검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수단의 방법 중에 하나가 실증주의가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이런 실증주의에 바탕으로 과학은 더욱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이런 과학의 실증적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이 바로 수학적 언어였던 것이었다. 특히 14세기에 유럽에 확산되었던 흑사병(검게 타 죽어간다는 의미, 페스트)으로 거의 1억 명의 생명을 앗아간, 그즈음에 놀랍게도 통계수학의 발전에 계기가 되었었다. 그 당시에 조선에서는 신의 저주 병으로 방치되었던 것에 수치를 느낄 뿐이다. 즉 비문명세계라 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세계, 즉 인간의 정치문화가 달라져 갔던 것이었다. 여기에서 인류는 봉건사회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전체주의 사회가 눈을 뜨게 되었던 셈이다. 즉 근대시대에는 더욱 그런 전체주의적 국가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조선시대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나의 이념으로 국가관을 세우고, 통치체제를 이루었던 것이며, 한편으로는 노예제도가 극성을 부렸던 시대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착오에서 등장한 신(新) 이념(理念)으로써, 마르크시즘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뿌리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을 거치면서 이데아론의 사상이 눈뜨게 되었고, 플라톤의 이상주의에서 마르크스의 전체주의가 고개를 내밀면서, 산업발달과 함께 등장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인간의 상품화가 발 빠르게 진화하게 되면서 오는 모순성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이론이 쉽게 먹혀들게 되었으며, 불붙듯이 퍼져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혁명, 폭력적 수단으로, 고대의 영웅처럼, 영웅 니므롯 같은, 신고대국가처럼 통치권력형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써 히틀러의 나치즘, 스탈린주의 등을 예로 들 수가 있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배력을 갖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적인 힘인 것이다. 과학적 사상은 매우 객관적인 면과 절대적인 면의 양면을 동시에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에 현대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의 위력은 신격화할 정도였다. 그래서 일부의 모지람 인간들은 이런 말까지도 했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과학을 믿겠다.’고 말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문명의 향수에 젖어 과학적 산물에 매료되어 있다. 얼마나 과학의 위력을 믿는지 모른다. 이젠 과학이 무엇을 만들어내든 다 믿겠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오늘날에 가장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 인공두뇌(AI)에 목이 타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을 대신할 가장 최첨단의 기계, 인조인간, 인공두뇌에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첨단 과학의 뒤에는 사악한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런 사악한 인간들은 전체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으며, 제국주의 국가를 꿈꾸는 자들인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과학적 실증주의에 의해 낳은 객관성과 절대성, 즉 객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가 주는 인식론에 의해 인류의 전체주의와 절대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거짓 그리스도인으로 등장할 인물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인물이 있다. 그를 숭배하는 집단은 국가를 넘어서, 인종을 넘어서 존재하고 있음을, 그는 거룩한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는 전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하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전체주의 국가가 나타난다면, 그는 신(神)처럼 추앙받으며, 온 인류가 까무러칠 정도의 놀라운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현재의 인류는 그러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과학의 절대적 진리, 객관적 진리에의 인식화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전체주의적 진리가 아니며, 객관적 진리도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절대적 진리인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즉 참 진리는 진실성에 바탕을 두며, 인간의 존재와 가치를 손상케 하지 않으며, 더욱 전체주의를 배척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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