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설늙은이]
집으로 돌아갈 날이 몇 달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집에 갈 것이고 비싸지 않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볼 수 있고 밥을 잘 챙겨 먹으면 괜찮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은 기간을 아쉬움 없이 지내다가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가나다순이었는지 비행기 꼬리 맨 끝 쪽에 타게 되었는데 기체가 많이 흔들렸었다. 비행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흔들림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 특유의 꿀렁거림이 불안하다고 느끼고 있는 차에 중앙좌석에 앉은 명랑한 오빠 한 명이 내쪽으로 쾌활한 말투로 농담을 던졌다.
"비행기 사고가 나도 우리는 살 수도 있다?"
".. 왜요? 설마."
"응. 비행기 머리가 무거우니까 머리부터 떨어질 테니까."
그 오빠는 그 한마디를 건네고 잠들었고 기체는 계속 흔들렸다. 그러다 한 스튜어디스가 내게 다가왔다.
"Are you okay?"
"Yes, I'm ok."
안부를 묻는 질문에 아임파인땡큐앤유를 외치듯 관성적으로 툭 튀어나온 대답을 건넸다. 내 말에 상태확인을 마친 스튜어디스는 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멀어지는 스튜어디스의 모습을 보며 문득 스튜어디스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길래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얼굴 근육이 애쓸 일이 많지 않은 기내에서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무의식 중의 어떤 반응이 세심한 스튜어디스가 발견한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몇 가지 준비를 마치고 바로 홍콩을 거쳐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친 짓이었지만 돌아오기 일주일 전쯤 같은 방 룸메이트가 학교에서 기획한 새로운 해외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또 서류를 넣었다. 어찌 보면 한풀이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곳에서는 아시아권 대학의 학생들이 모이는 자리였기에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아시아권학생들 간의 교류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커피나무를 생산하는 마을에서 숙식과 커피콩을 따서 볶고 갈아서 마시는 과정이 정말 귀한 경험이었고 대나무가 많아 일본과의 교류로 만든 대나무 자전거를 타보기도 했고 인도네시아의 예술작가와 콜라보 작업도 해 볼 수 있던 멋진 경험을 하고 끝에 약 3주간의 일정동안의 결과물을 전시하는 것으로 훌륭한 마무리를 지었다. 해외에서의 생경하지만 신선한 경험들은 모든 면에서 달랐기에 모든 감각에 입체적으로 세밀히 흡수되었다. 그 감각이 좋았다. 만족스러운 경험을 끝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시해 왔던 몸의 반응들이 하나 둘 터지기 시작했다. 전공준비를 위해 1년 휴학을 낸 상황에서 모든 것이 멈췄다. 집이라는 편안함에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하자 몸이 아우성이었다. 좁디좁은 지하철을 타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힘겨웠고 일단 걷는 게 힘들었다. 여기까지만 읽다 보면 이 사람은 도대체 병원은 안 가고 아프다는 말만 늘어놓나 싶겠지만 종종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보기는 했었다. 건강관리나 관심이 무뎠을 뿐 이상하다고 느껴지면 방문을 했기에 큰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1년의 휴학기간 동안 나는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흔하게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나를 옥죄는 공간이라는 감각을 매일 선명하게 느끼며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버거웠다.
"선생님, 제가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면 두렵고 답답하고 예전에 이상한 호흡에 식은땀이 나고 앞이 하얘지던 경험이 있어서 지하철 타기가 무섭고 불안해요."
"공황장애와 과호흡이 함께 온 것 같네요. 몸이 편안해질 수 있게 침치료를 할게요."
공황장애와 과호흡이 왔었다는 건 꽤 충격이었지만 내가 다녔던 한의원은 수백까지의 말을 해도 하나하나 다 정성 들여 대답해 주는 곳이었고 뜨끈한 침대와 찬 공기에 한숨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으면 편안해져서 좋았다. 다행히 그 증세들은 한의원을 다니며 나아졌다. 물론 나 스스로 느낀 당혹감을 다른 감정으로 치환해 들어내지 않고 무던히 지나쳤기에 금방 지나갔던 것 같다.
몇 번의 가벼운 병원 치료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친구가 있던 병원에 방문하기 전에는 몸 상태가 정말 최악에 최악으로 흘러갔다. 열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걸음을 걸으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멈춰서 한참을 쉬었다 다시 걷는 것을 반복했다. 심지어 나이가 많은 노인 한분이 지팡이를 짚고 걷는데 나보다 앞서 걸어가시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 동네에 사시는 노인분들은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많은데 여기저기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앉아서 쉬었다가 쉬엄쉬엄 올라가시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떤 분은 지팡이, 또 어떤 분은 수레, 혹은 유모차를 애용하시기에 이동시 걸음이 느리셨다. 그런데 내가 걷는 속도가 노인분보다 느리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둔한 나여도 문제가 있다는 걸 애써 모른 척하거나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 광경을 자주 본 엄마는 나를 데리고 병원을 갔다. 하지만 명확한 상태를 알 수 없이 매번 비슷한 소리를 들었었다.
"원하신다면 검사를 더 해볼 수 있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니 괜찮을 거예요."
엄마도 나도 그 말을 믿었던 건 전문의의 말이라는 점과 말 그대로 나는 젊었고 겉으로 봐도 튼튼함 그 자체에 어릴 때 운동도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했던 사람이었기에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병원들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그 말에 긍정을 쌓았다.
'그래, 이게 뭐 큰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