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이 찼다. 발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정윤은 눈을 감은 채 두 발을 다시 이불 속으로 끌어왔다. 두툼한 이불 바깥으로 도망친 발을 찬 공기가 때려대는 통에 잠을 반쯤 깼지만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부지런을 떨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었다.
미술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취업 준비를 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말로는 취업 준비라고 하지만, 사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대단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꼭 취업을 해야 되는가 싶기도 했다. 그냥 이대로 학원 아르바이트나 하며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멀찍이서 차 경적 소리가 울렸다. 창밖에서 날아 들어온 경적 소리는 정윤이 덮은 이불 위로 호르르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슥 빼고는 소리가 떨어진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위로 살그마니 그림자가 졌다.
창문을 두들기는, 이불 위로 낙하하는, 생선팔이 트럭 소리, 길고양이 울음소리, 햇볕 떨어지는 소리, 구름 나는 소리를, 지켜보다가. 정윤은 이불을 허물처럼 벗으며 구무적구무적 일어났다. 이불 위에 쌓인 소리들은 스르르 흘러내려 공기 중으로 소르르 사라졌다.
이불을 벗은 정윤은 맨몸이었다. 그는 맨몸으로 잠을 잤다. 사계절 내내 그랬다. 추위를 많이 타는 탓에 환절기와 겨울에는 감기에 자주 걸렸다. 그래도 약국에서 산 종합감기약과 타이레놀을 한 움큼씩 먹으며 버텼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맨몸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잠옷을 입으라면 입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고, 정윤은 맨몸으로 자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다, 언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엄마랑 같이 살 때만 해도 잠옷이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잤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자기 시작한 것은 자취를 시작한 이후였다. 어느 샌가 그렇게 되었다.
맨살에 와 닿는 한기에 몸을 떨며 화장실로 향했다. 이때가 가장 싫었다. 화장실에는 거울이 있었다. 그의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거울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치약을 칫솔에 짜고, 양치를 하기 위해 거울을 마주한 정윤은 칫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치약을 묻힌 솔 부분이 타일 바닥으로 떨어졌다. 딸그락. 플라스틱과 타일 부딪는 소리도 잇따라 떨어졌다. 그는 칫솔을 줍지 않았다. 떨어진 소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윤은 입을 조금 벌린 채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텅 비어 있었다.
이마부터 턱까지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눈코입이 모두 사라졌다. 구멍은 깊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 속은 검은 장막을 친 듯 평면적이고 단단한 어둠처럼 보이다가도 뿌옇고 허이연 안개가 가득 일렁였다. 언뜻 깊은 바다인가 싶다가도 별빛 하나 없는 밤하늘이었다. 무언가 빽빽이 찬 것 같다가도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 같았다.
정윤은 손을 들어 거울에 비친 얼굴, 거기 뚫린 구멍을 만져 보았다. 손가락에 닿는 것은 미끄럽고 차가운 거울의 표면이었다. 그 손을 떼어 다시 이쪽으로 가져왔다. 얼굴을 만져 보았다. 살금살금. 누군가에게 들킬 새라.
손가락에 닿는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돼. 그는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다 뒤통수를 때렸다. 머리통이 얼얼했다. 어쨌거나 머리 뒤편은 만질 수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거울을 보며 얼굴로 손을 올려봤지만 소용없었다. 거울 속에서 그의 손은 어둠을,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손이 그 안에서 보였다 말았다 했다.
정윤은 손을 내렸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 온수를 틀었다. 쇠로 된 구멍 속에서 찬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기다렸다. 다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둥그런 얼굴 속에는 여전히 검은 무언가가 고여 있었다. 역시 그새 사라질 리는 없나.
물에 손끝을 대어 보니 점차 따뜻해졌다. 침착하게 세수를 시도했다. 세수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얼굴을 닦고 떨어뜨린 칫솔을 주워 물로 닦고, 양치까지 한 뒤 다시 거울을 보았다. 분명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거울 속에서는 그것이 보이지를 않았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는데, 그리고 만질 수는 없는데 세수는 되고 양치도 된다니. 어쨌든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고 냄새도 잘 맡을 수 있었다. 먹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정윤은 화장실에서 나와 평상복을 입었다. 안경을 썼다. 안경은 문제없이 쓸 수 있었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인간은 얼굴이 뻥 뚫려 있었고, 그 위에 안경만 덩그러니 걸터앉아 있었다. 거울로 양쪽 귀는 보였지만 코가 없어서, 안경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패딩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집에서 2분 거리의 편의점까지 걸어가는 길에 다섯 명 정도의 행인과 마주쳤다. 기이하거나 경악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 사람이 좀 힐끔거리기는 했지만 얼굴 없는 괴물을 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정윤은 그가 왜 쳐다보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곁눈질에는 익숙했다.
편의점에서 김밥과 샌드위치와 커피, 그리고 초콜릿도 하나 골랐다. 계산대 앞에 섰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는 발끝에서부터 용기를 끌어내었다. 그리고 계산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갓 스무살쯤 된 듯 앳된 얼굴의 아르바이트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손바닥에도 땀이 조금 났다. 안녕히 가세요, 하는 성의 없는 한 마디가 검정색 패딩 소매를 살짝 건드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유튜브를 틀어놓고 편의점 김밥을 먹었다. 영상을 켜 두긴 했지만 거의 보지는 않았다. 노트북에서 튀어나온 말소리와 웃음소리, 효과음과 배경음악이 책상 위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나갔다 온 느낌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과 정윤이 거울로 보는 것이 같지 않은 듯했다. 얼굴에 뚫린 구멍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차피 정윤은 거의 거울을 보지 않았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꾸미는 데에도 관심이 없었다. 구멍이 난 덕에 흉한 거 볼 일 없어졌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윤은 불고기 김밥을 우물우물 씹었다.
정윤은 엄마가 “우리 딸 예쁘다”라거나 “아유 오늘 예쁘네” 정도의 인사치레조차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엄마는 슈퍼 아줌마나 길 가는 꼬마에게는 천연덕스레 칭찬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낳아준 모친이 그럴 지경인데 누가 정윤의 얼굴을 좋아해 주겠는가? 그 자신조차 마찬가지여서, 정윤은 자신의 얼굴을 좋아해 본 적도, 보기 좋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태어난 이래 단 한 순간도. 그래서 그는 얼굴이 갑작스레 사라진 연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좀 희한하다고 생각했으나 그 이상의 감정은 가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정윤은 여느 때와 같이 빈 캔버스를 하나 이젤에 올리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 등을 곧게 편 채 눈을 감고, 밀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찰나 잠깐만요! 외치는 목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정윤은 재킷 위를 두들겨 오는 다급한 소리에 놀라 서둘러 열림 버튼을 눌렀다.
“휴, 감사합니다.”
허둥지둥 뛰어 들어온 사람은 지운인지 지훈인지 하는 다른 선생님이었다. 그는 정윤보다 조금 늦게 학원에 들어왔는데 계약직이기는 했으나 시간제 파트타임인 정윤과 달리 풀타임으로 일했다. 정윤이 알기로 자신보다 서너 살 많았고, 키가 훤칠한데다 세련되게 차려입고 다녀 여자 선생과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정윤은 그와 두어 번 인사를 나누기는 했으나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정윤 쌤? 맞죠?”
“아, 네. 안녕하세요.”
“오늘 좋아 보이시는데요.”
느닷없는 칭찬에 정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이런 말은 태어나서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이게 칭찬 맞나? 그냥 하는 인사치레인가? 인사치레로 하는 말조차 별로 들어본 적이 없어 분간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라 답해야 하지. 그는 어정쩡하게 고개만 숙였다. 빨리 내리고 싶었다.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리다 엘리베이터 측면에 달린 거울을 보고 말았다. 거울 속에는 다소 부스스한 귀밑 단발머리의 구부정한 여자가 텅 빈 얼굴을 한 채 이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안면 한가운데에 떠 있는 안경 때문에 더 기이해 보였다. 정윤은 황급히 머리를 수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이후로도 그날은 좀 이상했다. 다른 선생이나 학생들이 평소보다 유독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들은 부드럽게 정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단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시답잖은 소리를 하거나 지훈(그의 이름이 지훈이 맞다는 것을, 오늘 시간표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비로소 알아차렸다)이 그랬듯 칭찬인지 인사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심지어는 오늘 예뻐 보인다고 말한 선생님도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라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아이, 정윤 쌤 말이에요, 칭찬을 건넨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예뻐 보인다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얼굴에 뚫린 구멍과 연관이 전혀 없을 리는 없었다. 그게 생긴 뒤로 남들에게는 오히려 좋게 보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그전보다는 말이다. 자신은 이제 거울로 그런 걸 볼 일이 없어 좋았고, 타인의 태도도 우호적이니 이래저래 좋았다. 내 인생에도 좋은 일이 생기네.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다 눈이 마주친 학생이 미소를 짓자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윤은 평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었다. 오늘은 보통 때보다 두 배는 많은 이야기를, 세 배는 많은 사람과 주고받은 것 같았다. 퇴근하며 나서는 그에게 내일 뵙자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네 명이나 되었다.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다.
유달리 지치는 기분에 모처럼 집 근처의 카페에 들렀다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커피가 맛있었으며 음악 선곡도 마음에 들었고 정갈한 인테리어에 세련된 분위기가 있어 좋아하는 카페였다. 자주 가지는 못했다. 미술학원 월급이 아르바이트치고는 벌이가 괜찮은 편이었지만 엄마에게 생활비를 얼마간 보낸 뒤 월세를 내고, 화구를 사고, 아직 한참 남은 학자금 대출을 갚으면 남는 것이 별로 없어 항상 쪼들렸다. 인스턴트 커피보다 비싼 건 사치였다. 누구를 만나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카페에 들어가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다. 하긴, 돈이 있었더라도 혼자 카페에 가는 일은 잘 없었을 터였다. 나 같은 인간이 이렇게 예쁜 카페에 들어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구도 반기지 않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었으니. 오늘같이 피곤한 날엔 이 정도 사치는 괜찮겠지, 그래도.
카페는 손님으로 북적였다. 이십대 초중반의 어린 커플들, 혹은 친구들끼리 몰려 온 예쁜 여자애들 그룹이 대부분이었다. 부드러우면서 비트 있는 로파이가 옷깃을 톡톡, 톡톡, 건드렸다. 재킷 끝자락과 소매에 와 닿는 음악에 어깻죽지에 엉겨 있던 피로가 조금 풀어졌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계산을 마치자 직원이 진동벨을 주며 상냥하게 웃었다. 누가 나한테 이렇게 웃어 준 게 얼마 만이더라, 정윤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저기요.”
정윤은 그를 향해 날아온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저기요!”
목소리가 정수리를 때렸다. 여자의 음성이었다. 소리는 깎아낸 연필심처럼 뾰족했다. 정윤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말을 잃었다.
“…….”
거기에는 얼굴이 있었다. 텅 빈 공허만 남기고 사라진, 허옇게 뻥 뚫린 구멍에 본디 자리 잡고 있던 것. 정윤의 얼굴. 정윤이 그토록 보고 싶지 않았던, 그토록 피했던, 그토록 진저리쳤던. 연기처럼 사라졌던 그것이 있었다.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좁은 미간에는 굵다란 주름이 잔뜩 잡혔고, 꾹 다문 입가에는 팔자 주름이 또렷했으며 널찍한 콧구멍이 콧김을 내뿜으며 벌름거렸다. 씩씩거릴 때마다 얽은 여드름 흉터들이 꿈틀거렸다. 정윤은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막았다. 달아나고 싶었다.
손에 쥔 진동벨이 웅웅거리며 빛을 냈다. 그는 안도하며 서둘러 걸어가 커피를 받았다. 새카만 커피의 무게가 손바닥 안에서 찰랑찰랑 느껴졌다. 종이컵은 기다랗고 따뜻했다. 가슴이 진정되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도망쳐야겠다.
정윤은 다소 급하게 카페를 나왔다. 시선을 느끼면서, 그러나 무시하면서.
그 얼굴은 정윤을 놓치지 않았다. 얼굴은 찌푸려진 채로 그를 따라왔다. 구둣발 소리가 귓바퀴를 흔들었다. 따각따각. 따각따각. 그러더니 팔을 잡아채었다.
“사람 무시해?”
얼굴이 눈앞으로 밀려들었다. 정윤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코와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왔다.
“뻔뻔하게 남의 얼굴 훔쳐가 놓곤, 모른 척하면 다야?”
“네?”
훔쳐가다니?
“그쪽 얼굴, 지금 달고 있는 거, 내 거라구요. 원래 내 거!”
“지금 얼굴?”
얼굴이 바뀌었단 말인가? 내가 보지 못하는 검은 공허가 원래 이 사람의 얼굴이었던 건가? 설마, 아니 역시 사람들이 다정하게 대해주고 친근하게 이야기한 게 바뀐 얼굴 때문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결국 얼굴에 무슨 일이 생기긴 한 거였구나. 거울 속으로 보이는 구멍이 다가 아니었구나.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정윤을 본 그 얼굴이 헛웃음을 쳤다. 정윤은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3차원으로 보는 경험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심한 뱃멀미를 하는 듯 뱃속이 울렁거리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눈앞의 얼굴이 굴절된 거울로 보는 것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귓속이 윙윙거렸다.
“아니, 그쪽은 거울도 안 봐요?”
“어, 그게, 보긴 봤는데….”
“어휴, 답답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콧등을 때렸다. 정윤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상대는 고개를 빠르게 젓더니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홱 들었다. 스마트폰을 든 손의 네일이 화려했다. 정윤은 순간 총천연색 빛깔의 손톱 위에서 반짝이는 보석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 찰칵, 소리가 이마를 찰싹 때렸다. 그는 어안이벙벙해 멍청히 선 채 눈만 끔벅거렸다.
“자, 이거 봐요! 보라구!”
여자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정윤은 순순히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는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정윤의 옷을 입고 정윤의 헤어스타일을 한, 그러나 알아볼 수 없는 누군가. 안면을 채우고 있는 것이 블랙홀 같은 구멍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의 얼굴이라는 점이, 사진을 찍으면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는 점이 놀라웠지만 정윤이 가장 놀란 부분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 얼굴은……몹시 심미적이었다.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어, 너무…예쁘네요.”
정윤은 간신히 입을 떼어 한 마디를 뱉었다.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정윤의 얼굴을 한 여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알겠어요? 미안한데, 이런 얼굴은 도저히 안 된다구요. 편의점도 쪽팔려서 못 가겠어! 집에 처박혀 있으려니까 갑갑해 죽겠어서 커피 사러 나온 건데, 진짜 딱 걸렸지. 자, 이제 내 얼굴 다시 내 놔요.”
높은 목소리가 날아와 재킷에 뚝뚝 박혔다. 정윤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런 미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자신의 얼굴로 바꿔치기 된다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거다.
“저, 근데…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제가 한 것도 아니라.”
“뭐라구요?”
“그냥, 자고 일어나니까 거울이…안 보이더라고요. 갑자기요. 얼굴이 바뀐 줄도 몰랐어요. 거울만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상대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사람의 표정이 그렇게 빠르게 바뀌는 것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 여자가 팔을 덥석 잡아왔다. 누군가 이렇게 몸을 건드린 적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자신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구역질나는 울렁거림이 다시 명치께로 차올랐다.
“거울에서, 어떻게 보여요?”
“음…말로 하긴 어려운데, 까만 구멍이 뚫린 것처럼…….”
정윤은 자신의 얼굴이 혼이 빠진 듯 멍해지는 것을 보았다.
“씨발.”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마치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것처럼. 좌우로 도리질하는 낯익은 얼굴에 공포가 배어 있었다. 정윤은 그것을 측은하게 여기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여자의 이름은 윤정이라고 했다. 정윤정.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것조차 누군가의 못된 장난인 것 같았다. 그녀는 공포를 다 떨치지 못한 얼굴로 전화번호를 남기고, 정윤의 번호도 받아서 돌아갔다. 길고 윤기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등을 돌리는 뒷모습에서 혼란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름다운 머리칼은 정윤의 얼굴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