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해가 진 뒤 어느 일본식 술집에서 만났다. 개별 룸에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꾸며진 곳이었다. 윤정은 이런 곳이 아니면 갈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바에 앉아 있으면 수많은 남자들의 번호를 받는 경험은 결코 할 수 없을 터였다. 이 얼굴로는. 그리고 지금은 그런 바는커녕 극히 평범한 맥주집도 고개를 들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술집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것은 윤정이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게 갑갑해 나오고 싶기도 했고 상대도 알코올이 들어가면 좀 더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까 싶었다.
보고 싶기도 했다. 나의 얼굴이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나 사실…이런 곳 처음이야.”
정윤이 주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녀가 자신보다 네 살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윤정은 말을 놓으라며 밀어붙였다. 그래요, 하며 답했다가 입술을 삐죽이는 그를 보고 하는 수 없이 그래, 라고 정정한 뒤 겨우 꺼낸 두 번째 한 마디였다. 진짜 소심하네. 윤정은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답답했지만 부끄럼을 타는 자신의 얼굴이 좀 귀엽기도 했다. 역시 난 너무 예쁘다니까. 그래서 그는 정윤을 봐주기로 했다.
“처음이라고? 그럼 언니, 술은 어디서 마셨는데?”
“집에서….”
“집? 아니, 술을 평생 집에서만 마셨다고?”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정윤을 윤정은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대답이 하나 하나 신기하기도 했지만 새삼 정윤의 얼굴 말고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웃는 입을 가린 손이 자신과 달랐다. 겨울이라 두꺼운 니트를 입고 있었지만 옷 위로 드러나는 어깨선이나 팔 두께도 달라 보였고 가슴 크기도 다른 것 같았다. 키는 비슷했지만 몸집은 좀 차이가 났다. 아마도 얼굴만 가져간 모양이었다. 하긴 몸까지 바뀌었다면 나도 이미 알았겠지.
두 사람은 야키토리 몇 접시와 하이볼을 주문했다. 정윤이 뭘 골라야 될지 모르겠다고 우물쭈물해서 주문은 윤정이 전담했다. 정윤은 야키토리를 먹어본 적도 없고 하이볼을 마셔본 적도 없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온 거야?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그렇지만 술기운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은 너무 예뻤다.
“나 뭐 물어봐도 돼?”
정윤이 망설이는 듯 우물쭈물하다 어렵게 입을 열더니 질문을 꺼냈다. 그녀가 먼저 무언가를 물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윤정은 반색하며 테이블로 몸을 기울였다.
“뭔데? 뭔데?”
“혹시 얼굴 만질 수 있어?”
“얼굴을 만질 수 있냐고? 뭔 소리야?”
“아, 미안…. 그러니까, 어……나는 얼굴이 안 만져지더라고.”
“그걸 만진다고?”
“만진다고 해야 하나. 잡아보고 싶었달까? 거기 있는 게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안 그래?”
정윤은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왜 저래? 하는 짓이 갑갑해서 짜증이 났지만 우습게도 갑갑하게 구는 것조차 귀여워 보였다.
윤정은 한 번도 그것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1초도, 단 한 순간도 없었다. 피부 관리 걱정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이 얼굴을 그렇게 오래 달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내 얼굴이라면 얼마든지 만질 수 있지.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래, 내가 만져볼까? 되려나? 되겠지? 돼야 되는데.”
“네?”
놀랐는지 여자의 입에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윤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정윤이 뭐라 하기 전에 잽싸게 그녀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정윤이 얼떨떨한 얼굴로 윤정을 쳐다보았다. 얼른 손을 들어 고개를 이쪽으로 당기고는, 손끝으로 정윤의 뺨을 살짝 만졌다. 살결이 느껴졌다.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어떡해! 느껴져! 진짜 만져져!”
“나도 느껴진다.”
침착하려고 애쓰는 어조였지만 가벼운 열기가 느껴졌다. 정윤도 약간 들뜬 것 같았다. 윤정은 이제 양손을 들어 강아지 얼굴을 잡듯 그녀의 양쪽 뺨을 덥석 잡았다. 뺨을 감싸 쥔 손바닥으로 친숙한 살결이 느껴졌다. 윤정은 그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커다란 눈, 동그란 이마, 작고 날씬한 코, 조그만 턱. 그린 듯 가느다란 눈썹과 그 위의 연한 갈색 점, 숱 많고 기다란 속눈썹.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 내 얼굴!
“아, 언니, 진짜. 내가 진짜 이 얼굴 봤을 때 그때…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그럴 만도 하지.”
정윤이 볼이 눌린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얼굴이 발갰다. 윤정이 지나치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며 손을 뗐다. 마음 같아선 밤새 그렇게 얼굴만 쳐다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예의란 게 있으니까.
“나 너무 신났나? 너무 반가워가지고.”
“괜찮아.”
정윤은 목을 만지며 대꾸했다. 다소 소극적으로 들리는 어조였지만, 괜찮다는 말 자체는 정말인 것 같았다. 아니었다면 진즉에 손 떼라고 면박을 줬을 것이다. 어쨌든 진짜 막 싫은 눈치는 아니었어. 윤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윤정이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소심하고 제일 답답하고 제일 못생기긴 했지만, 제일 착한 것 같았다. 아마도.
두 사람은 막차 시간에 맞춰 헤어졌다. 윤정은 새벽까지 있을 심산이었지만 정윤이 먼저 막차를 타야 한다며 일어났다. 두 사람은 술집에서 나오면서 헤어졌다. 윤정은 앱으로 택시를 불렀는데, 같이 타고 가자고 몇 번을 졸라도 정윤은 한사코 거절했다. 꼭 지하철을 타야 되나, 택시가 편하지. 이렇게 부탁해도 안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윤정은 좀 짜증이 났지만 술기운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자 짜증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 얼굴을 마주하면 뭐든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저렇게 사랑스러웠나? 하긴 그러니까 남자들이 맥을 못 췄지.
조만간 또 만나야겠다. 윤정은 그녀를 다시 만날 생각에 기분이 들떠, 잠시 동안 자신이 정윤의 못생긴 얼굴을 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너 왜 요즘 학교 안 나가냐?”
다음 날 정오 무렵 느지막하게 일어난 윤정이 아점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을 때, 식탁에 앉아 있던 민정이 대뜸 물었다. 식탁 위에는 두꺼운 책과 뭔가 빽빽이 적힌 노트, 볼펜, 그리고 반쯤 남은 간장계란밥이 놓여 있었다. 밥 먹으면서 공부라니. 대학에 가고도 저 지랄할 줄은 진짜 몰랐다. 윤정은 동생이 거실에 나와 공부하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을 때가 없었다. 공부 잘 한다고 유세 떠는 거지, 나한테.
“어차피 좀 있음 방학인데 뭐.”
윤정이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며 툴툴대듯 둘러댔다.
“기말이 끝나야 방학이지. 시험은 안 봐? 진짜 인생 조지려고 그래?”
그는 못 들은 척 부엌 선반을 열어 시리얼을 꺼냈다. 상자가 가벼운 것 같아 흔들어 보니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미쳤냐 진짜? 엄마한테 다 말한다? 등록금이 얼만데.”
“말해. 신경이나 쓰겠냐. 아 아니다, 운 좋으면 자퇴하라고 하고 네일 샵이나 하나 차려줄지도?”
“양심 얻다 팔아먹었냐?”
민정이 경멸어린 표정으로 윤정을 쳐다보았다. 윤정은 건조대에서 자그마한 밥그릇을 하나 집어 들고 식탁으로 가 그릇에 시리얼을 채웠다. 그리고 우유를 부었다.
“아, 숟가락.”
윤정은 급하게 건조대로 돌아가 숟가락을 가져왔다. 그는 시리얼이 우유에 젖어 눅눅해지기 전에 먹는 것을 좋아했다.
“야. 아무리 전문대라고 해도 대학은 나와야지. 너 학교 관두면 고졸이야, 고졸.”
민정은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성난 어조로 쏘아붙이며 윤정을 노려보았다. 그는 시리얼을 우물우물 씹으며 대꾸했다.
“알 게 뭐야. 얼굴도 이제 이 모양인데. 대학은 무슨, 살아서 뭐 해.”
“개소리 한다 진짜.”
윤정은 시리얼 그릇만 내려다보며 먹는 데 열중했다.
“그래. 뭐,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지가 지 인생 말아 드시겠다는데. 잘해 보세요.”
민정은 빈정거리는 어투로 한 마디 덧붙이고는 책과 노트를 가방에 챙겨 넣은 뒤, 난 시험 보러 가야겠다, 하고는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윤정은 문이 닫히며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숟가락을 내려놓고 흐어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얼마간 울고 나자 윤정은 약간 속이 풀렸다. 민정에게 화도 좀 났다. 좋은 대학 다니면 다야? 씨, 지가 내 인생에 무슨 상관이라고. 시리얼은 다 눅눅해졌다. 입맛도 없었다. 남은 것을 싱크대에 쏟아 붓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정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뜸을 들였다 답장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또 남자도 아닌데 이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정윤 언니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자신이 미적거리던 것이 괜히 바보같이 느껴졌다. 윤정은 당장 앱을 켰다. 답장을 작성하던 찰나,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나 오늘 좀 일찍 퇴근했는데 안 피곤하면 잠깐 커피라도 마실래?’
윤정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윤이 먼저 만나자고 하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양손 안에 들어온 그 얼굴이 여전히 선명했다. 나의 얼굴. 술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뺨과 호기심 어린 눈동자. 조심스럽게 웃는 표정과 삼가는 태도. 그 위에 얹힌, 낯익고 낯선 얼굴.
그 얼굴 아래에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서양회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한 상태로 미술학원에 나가며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졸업한 뒤 뭘 해야 할지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윤정이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는 미술 전공자가 없었다. 정윤이 하는 일, 정윤이 속한 세계와 그녀가 하는 말들이 다 신기하고 멋있었다.
정윤은 정말 그 얼굴을 훔쳐간 것이 아닐까? 정말 그 말대로 우연히 얻게 된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게다가 왜 하필 윤정의 얼굴인 걸까? 세상에 예쁜 여자는 많고도 많은데.
윤정은 오랜만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이 못난 얼굴에 손을 대는 건 아직도 살짝 꺼림칙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런 꼴로 나다닐 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야지. 또, 한 발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정윤 언니에게 좋은 이미지를 좀 보여줘야지 않겠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화장대를 꽉 채운 화장품들을 내려다보았다. 립스틱과 마스카라, 아이섀도, 아이브로우 펜슬, 젤 라이너, 파운데이션, 컨실러, 하이라이트, 쉐딩, 온갖 종류의 픽서, 브러시……. 며칠 동안이나 얘들을 방치했다니, 내 영혼의 단짝들인데. 이제 너희들이 할 일이 많으니까 힘내야지.
윤정은 천으로 가려둔 화장대의 거울을 아예 바닥에 내려 버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화면을 켜고는 정면에 세웠다.
두 사람은 윤정이 종종 다니던 카페에 왔다. 식물이 많고 채광이 좋은 카페였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은 추웠지만 실내는 식물원처럼 따뜻하고 습한 편이었다. 윤정의 앞에는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담긴 유리컵이, 정윤의 앞에는 따뜻한 핸드드립 커피가 담긴 잔이 놓였다. 그 위로 평일 오후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있잖아. 네 얼굴, 내가 그려주면 싫을까?”
윤정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얼굴?”
“지금 네가 가진 것 말고, 원래 네가 아는 네 얼굴.”
그는 입을 떡 벌렸다.
“진짜? 어떻게?”
“네가 좋아하는 사진 있으면 그걸 보고 그려줄게.”
“할래! 무조건 할래! 좋아!”
“그럼 사진 하나 골라 줘.”
당장 휴대폰의 사진 앱을 열어 예전에 찍어 둔 사진을 주르륵 훑어보았다. 원래 얼굴일 때의 사진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게 너무 많았다. 이렇게 예뻤는데. 한참을 고르고 골라 겨우 하나를 선택했다. 망원이었는지 성수였는지, 어느 카페에서 성우가 찍어 준 사진이었다. 마치 연예인 화보처럼 나와 제법 오랫동안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두었던 기억이 있었다. 정윤은 윤정이 고른 사진을 보더니 예쁘다, 라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꼭 자신이 자신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그녀는 윤정이 사진을 고르는 사이 화구를 모두 꺼내 두었다. 엽서 크기의 두껍고 뻣뻣한 종이와 미술용 연필, 조그만 휴대용 팔레트와 붓. 초등학생 때인지 중학생 때인지 학창 시절 미술 시간 이후로는 그림의 기역 자와도 인연이 없던 윤정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스마트폰은 정윤이 사진을 보기 위해 가져갔으므로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윤정은 커피를 마시며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했다.
연필 끝이 종이 표면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선이 생겨났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소리는 길게 늘어졌다가, 짧고 빠르게 들렸다가, 들릴 듯 말 듯 했다가, 다시 귀에 꽂혔다. 단순한 하나의 곡선은 여러 개의 선이 되었다가, 어떠한 형태를 만들어내었다. 구불거리는 무엇이었는데, 갑자기 인간의 형체가 되었다.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카페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도 공중에 떠다녔지만 윤정의 귀에는 종이에 가 닿는 연필 소리만 선명하게 들렸으며, 눈에는 흰 종이 위에 움직이는 검은 선만 보였다. 다른 모든 것은 희미하게 웅웅대며 일렁일 뿐이었다.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는 소리는 오로지 단 하나, 정윤이 손에 쥔 연필이 종이 표면과 만날 때 생겨나는 고요하고도 압도적인 하나의 음(音).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는 현상은 섬유질 위에 흑연이 마찰하며 발생하는 평면 위의 창조.
목이 뻐근해진 것도 몰랐다. 됐다, 나직하게 말하는 정윤의 목소리가 연필 소리에 실려 들렸다. 엷게 그은 흐릿한 스케치. 얼굴형만 좀 뚜렷했고 눈과 코는 겨우 알아볼 지경이었다.
“벌써? 다 그린 거야?”
정윤은 실망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윤정을 보고는 슬며시 웃으며 팔레트를 열었다. 팔레트 안에는 칸마다 짜 놓은 물감이 조르륵 들어앉아 있었다. 칸막이 바깥에 앉은 것들도 몇 있었다.
“우와. 이게 뭐야? 엄청 작다. 신기하다.”
“과슈야. 불투명 수채화.”
“그런 것도 있어? 그게 뭔데?”
“보여줄게.”
정윤은 붓을 들어 식수가 담긴 종이컵 안에 넣고는 흠뻑 적셨다. 물을 머금은 붓은 물감 위에 앉았다가 티슈 위에 살짝 발자국을 남기고는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붓이 종이 위에서 몇 번 스텝을 밟자 그림 속 얼굴에는 벌써 사람다운 혈색이 감돌았다. 그 붓끝은 팔레트와 물컵, 티슈, 종이를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윤정은 넋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슬쩍슬쩍 정윤을 훔쳐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그토록 열중하며 그림을 그리는 풍경은 생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윤은 계속해서 윤정의 사진을 보았다가,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윤정을 보기를 반복했는데 윤정은 그가 고개를 들 때마다 반찬에서 당근을 골라내다 엄마에게 걸린 아이처럼 뭔가 들킨 기분이 되었다. 자신도 아니고 스마트폰 속의 사진을 보는데도 그랬다. 그녀의 눈은 사진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그 너머의 어떤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단순히 윤정의 머리나 눈코입 같은 얼굴 생김이 아니라,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그래. 꼭 지금 윤정의 얼굴 한가운데 자리한 그 어둡고 커다란 무언가, 그것을 꿰뚫고 그 너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마음이 조여 왔다. 윤정은 손 안쪽에 살짝 땀이 난 것을 느꼈다.
“거의 다 됐다.”
정윤이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삭였다. 자신의 시선을 들킨 걸까? 윤정은 얼른 자세를 고쳐 앉고는 몸을 숙여 아직 정윤이 손으로 고정하고 있는 그 종이를 자세히 보았다. 입술 사이로 와아,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종이 위에 그려진 사람은 말 그대로 그림 같았다. 잡지 화보를 찢어 그림으로 옮긴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아름답게. 그림인데도 왠지 사진보다 더 자신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비스듬히 틀어진 자세로 우아하게 컵을 든 채 이쪽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동자와 살짝 미소 지은 입술, 어깨를 덮은 풍성한 머릿결, 가볍게 홍조를 띤 뺨. 특히 눈동자는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 위로 붓이 몇 번 더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갔다. 붓끝이 한 번 닿을 때마다 그림 속의 여자는 점점 더 선명하고 아름다워졌다.
“끝.”
“끝이야? 다 된 거야?”
흥분한 그의 물음에 정윤은 씩 웃더니 응, 대답하고는 붓을 물컵에 넣고 휘저었다. 윤정이 여태껏 보아 온 그녀의 모습 중에 가장 자신 있어 보였다.
“당장은 어떻게 못 해도…그림으로라도 얼굴을 돌려주고 싶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정은 본인의 마음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이는 것을 느꼈다. 멈칫했다. 그는 보통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것은 조금 이상했으니까.
윤정은 무의식적으로 정윤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려던 몸을 간신히 멈추었다. 그리고 부러 시선을 내려 그림을 다시 보았다.
“너무 너무 예쁘다.”
진심이었다. 정윤이 웃었다. 윤정이 그림과 정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내 얼굴. 내 얼굴들…….
난데없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윤정의 것이었다. 성우였다. 조금 귀찮은 마음에 망설이다 윤정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응, 왜?”
“왜는? 어디야? 뭐 해? 나 지금 시험 좀 빨리 끝나서, 데이트하자고. 너네 집으로 갈게.”
“지금?”
“방금 출발했어. 한 삼사십 분 걸릴 듯?”
하는 수 없었다. 윤정은 전화를 끊은 뒤 정윤을 보았다. 그녀는 눈치를 챘는지 이미 화구를 챙겨 넣고 있었다.
“언니이….”
“남자친구지?”
“으응. 참, 언닌 남자친구 없어?”
“나?”
정윤은 놀란 듯 흠칫하더니 없어, 라고 대꾸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최근에 헤어졌나? 아님 얼굴 땜에 못 사귄 건가? 근데 못생긴 사람들도 사귈 사람은 다 사귀던데. 그래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정윤에게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좀 싫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좀 희한하긴 했지만 어쨌든 좋은 건 좋은 거였다. 그나저나 왜 남자친구가 없는지 궁금하네. 다음에 꼭 물어봐야지. 어쩜 여태 그것도 안 물어봤지, 속으로 생각하며 윤정은 그림을 조심스럽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