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주
기저에 남아 있던 우울감이 완전히 달아나고 있는 것 같다. 기분이 말도 안 되게 좋다. 우울증 약을 처음 먹었을 때 같은 느낌이다(일반적이지는 않은 케이스라는데 나는 약을 먹자마자 다음날부터 딴 세상에 온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플라시보인가 했는데 지속 투약하면서 느끼기로, 또 나중에 약물 치료를 종료해 나가면서 느끼기로는 위약효과가 아니라 진짜 몸에 약효가 잘 들었던 것 같다).
중국어 학원을 마칠 시간에는 평소 피로에 절어 귀가하는데 오늘은 싱글싱글 웃으며 집에 왔다. 평일 밤에 싱글거리며 지하철을 타고 있는 건 나밖에 없어서인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다. 왠지 더 의기양양한 기분이 되었다.
왜인지 들떠서 밤에 잠이 안 왔다. The Song of Achilles를 다 읽었다. 이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잘 알려진 이야기를 재미있게 쓸까? 익히 아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가면서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쓰는 데 십 년이 걸렸다고 해서 놀랐다. 그렇지만 매들린 밀러의 작품을 하나만 추천하라면 Circe로 고르겠다. 그 작품이 더 좋았다. 그나저나 작년부터 한 달에 원서 한 권 읽기를 했더니 영문 책 읽는 속도가 많이 빨라져서 뿌듯하다.
2시 반이 넘어서 눈을 감았는데 올해 들어 최고로 늦게 잔 것 같다. 그러고도 잠이 안 와서 뒤척거리다 겨우 잠들었다. 분명 불안한 기분은 아닌데 무슨 조증도 아니고 왜 이런담?
추워서 재택을 했다. 늦게 잤는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떠서 명상을 번개같이(?) 한 뒤 아침을 해먹었다. 십오 년 넘게 아침을 안 먹고 살았는데 요즘엔 아침 먹는 게 왠지 좋다.
새로 산 통밀빵 두 조각을 버터에 굽고 잠봉과 하바티 치즈, 루꼴라를 얹어서 오픈 샌드위치로 만들어 커피와 함께 먹었다.
점심에는 곡물이 든 샐러드 제품을 사둔 게 있어서 그걸 먹었다. 양이 모자라서 사과와 시나몬 파우더를 넣은 오트밀을 해 먹었다.
한창 일을 하던 와중 갑자기 비엔나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어졌다. 하지만 최근 커피를 많이 사먹었기 때문에 또 배달해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너무 먹고 싶은데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문득 지난번에 파운드 케이크를 하겠다고 사둔 휘핑크림이 떠올랐다.
휘핑 치는데 오 분이면 되는데 그냥 크림을 만들까?
설령 사무실 근무 중이었다 해도 나가서 커피를 사온다면 그것보다 더 오래 걸렸을 터였다. 못 만들 이유가 없었다.
재빨리 볼과 핸드믹서를 꺼내 휘핑을 쳤다. 핸드믹서를 돌리는 오 분 동안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셰프들이 손으로 머랭 치던 것을 생각하며 기술의 발전에 감사해했다. 그러다 보니 또 갑작스레 핸드믹서와 핸드 블렌더를 자주 쓰는 데 반해 너무 꺼내기 어려운 공간에 수납해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림은 금방 완성되었다. 냉장고에 넣어 둔 아메리카노를 꺼내 유리잔에 담고 크림을 얹었다. 컴퓨터 앞에 가져와 크림과 함께 한 입 마셨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백설탕을 꺼내기 귀찮아 흑설탕을 넣어 휘핑을 쳤는데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설탕을 많이 먹지 않으려고 일부러 꺼내기 어려운 곳에 두었다).
저 휘핑크림은 파운드 케이크가 아니라 커피 마시는 데 다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녁에는 파스타를 먹으려다가 카레가 먹고 싶어졌다. 골든커리로 카레를 끓여서 오징어와 채소를 넣어 먹었는데 내가 했던 카레 중에 역대급으로 맛있게 되었다. 채소의 익힘 정도가 아주 좋았다.
카레에 넣을 당근을 썰 때 당근 머리 부분을 잘라다 얕은 종지에 물과 함께 담아 놓았다. 당근을 물에 넣어 놓으면 당근 싹이 나는데 아주 귀엽다. 예전에 이모가 가르쳐 줬다.
후식으로 오렌지를 먹었다. 새로 산 오렌지도 너무 달지도, 시지도 않아 아주 맛있었다.
잠깐 간단한 리빙 포인트. 오렌지를 먹고 난 껍질은 설거지를 마치고 물기가 남은 싱크대를 닦는 데 쓰면 좋다. 세제나 수세미를 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싱크대를 청소할 수 있는데다 음식물 쓰레기까지 활용하여 일거양득.
근데 어떻게 하루종일 먹는 게 다 맛있을 수가 있지?
저녁을 다 먹고 핸드 블렌더와 핸드 믹서의 수납 위치를 바꾸었다. 잘 안 쓰던 수납함을 꺼내 담고는 countertop appliances라고 라벨링도 해 주었다. 공간 정리하는 건 아주 재미있다.
운동을 조금 하고 소설도 조금 썼다.
난 글 쓰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소설을 쓸 때는 머리에서 정말 얼마 없는 능력을 죄다 쥐어짜내는 기분이다. 이미 다섯 번쯤 짠 물수건에서 몇 방울이라도 더 짜내려고 하는 느낌이랄까. 나오지도 않는 즙을 쥐어짜고 짜내서 간신히 십 매, 많아야 이십 매 정도를 쓴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백 매(원고지 기준) 분량을 써내는 사람도 있다는데 내겐 그런 능력은 거의 마블 슈퍼히어로급 초능력처럼 보인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사람은 그렇게 쓸까? 나도 소설을 술술 쓰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오늘은 ‘열두 발자국‘을 마저 읽다 잘 생각이다.
링크드인에서 같은 사람이 인터뷰를 보라며 세 번째로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 두 개 메시지가 온 건 작년이었는데 작년에는 거의 링크드인을 열지 않아서 메시지가 왔다는 걸 올해 알았다.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회사였는데 필리핀 회사랬던가 그랬다. 생각해 보니 필리핀 회사는 하나도 모르는 것 같기도. 음, 졸리비(패스트푸드 체인이다)가 필리핀 회사였나? 방금 검색해 보니 맞다. 그럼 딱 하나 아나 보다.
얼마나 사람이 안 구해지길래 나한테 메시지를 세 번씩이나 보내나, 싶었는데 이번에 보낸 메시지를 읽어보니 업무 내용이 일본어 관련인 것 같다. 흠. 필리핀 회사니까 영어로 소통할테고 오피스는 한국에 있으니 한국말도 해야 될 테고 일은 일본어… 영어랑 한국어 일본어를 다 잘하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보통 일본어를 하는 사람은 영어에 관심이 덜하고 영어를 하는 사람은 일본어에 관심이 덜하다. 문화가 너무 달라서일까? 중국어 학원에서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아주 많이 봤는데.
도쿄에서 1년 정도를 살았다. 정확히는 1년도 안 되고 11개월 정도였다. 귀국한 것이 2017년이 되기 직전의 12월 즈음이었으니 벌써 8년이나 흘렀다. 일본어는 너무 많이 까먹어서 할 수 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살짝 자랑을 하자면, 일본에 살 당시에는 한국인이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이 장난으로 거짓말을 치는 줄 알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일본인이라고 하고 다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실은 일본어를 깊이 있게 잘한다기보다 발음과 인토네이션을 잘 흉내낸 게 컸다(전공이 일본어였기는 하지만 학부생의 실력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 것이다).
하지만 이젠 정말 일본어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 기껏 배운 것이 좀 아깝기는 하다. 항상 다시 해야 하는데, 생각하긴 하는데 일본어 공부할 시간이 있으면 영어에 몽땅 써 버리고 만다. 영어가 더 재밌는 걸 어떡해.
링크드인 메시지를 보낸 채용담당자에게는 이제 난 일본어를 못해서 그쪽이 찾는 인재가 아닌 것 같다고 답장했다.
The Song of Achilles 다음으로 읽을 영어 원서는 넷플릭스의 ‘흑백 요리사‘로 유명해진 셰프 에드워드 리의 Buttermilk Graffiti다. 쇼를 보고 에드워드 리 셰프에게 인간적으로 관심이 생겼는데 저서 중에 요리사들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제임스 비어드 상을 받은 책이 있다고 해서 구매했다. 전공이 영문학이었댔나 문예창작이었댔나, 그렇게 들어서 문장도 좋을 것 같았다. 음식 이야기가 많이 나오겠지? 히히.
영어를 잘하면 좋은 점은 수없이 많지만 내게 제일 좋은 건 단연 두 개다. 가용한 정보의 폭이 말도 안 되게 커진다는 거, 그리고 영어로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다는 거. 한국 사람들은 한국어의 아름다움은 어떻게도 번역할 수 없다고 국뽕을 많이 들이키는데(한강 선생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로 그래도 잠잠해진 것 같다) 그건 사실 전 세계 모든 언어가 다 그렇다. 우리가 읽는 번역서가 영어의 아름다움을 다 옮겨놓은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요즘 기분이 들떠서인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너무 피곤하다. 오늘은 푹 잘 수 있길.
내일도 아침에 샌드위치 해 먹어야지.
한 주 중 제대로 잠을 잔 날이 너무 적었다.
몸이 피곤해져서 그런지 이젠 기분이 좋아서 잠을 못 잤던 건지 불안해졌던 건지 분간이 안 된다. 뇌과학 책을 읽으면 사실 뇌는 흥분과 불안을 구분하지 못한댔는데, 어쩌면 흥분해서 들떴다가도 심장이 두근거리면 자동으로 불안으로 해석하는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내가 가슴이 뛸 때는 좋아서 흥분했을 때보다는 불안할 때가 많았으니까.
어느 쪽이든 간에 별로 평화로운 마음 상태가 아니어서 명상을 많이 했다. 명상이란 평생 해도 계속 잡생각이 들 것 같다.
저녁으로 푸타네스카 스파게티를 해 먹었다.
마음에 힘이 부족한지 생산적인 걸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미드를 보지 않았다(좋아하는 미드를 볼 때에도 반쯤은 공부 모드로 본다).
용감한 형사들을 오랜만에 보고 넷플릭스 게임인 This is a True Story를 했다. 구성이나 내용, 일러스트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완결까지 플레이타임이 1시간도 안 되어서 그게 제일 좋았다.
잠이 부족해서인지 자꾸 디저트가 너무 먹고 싶다.
2월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일기 쓰는 게 귀찮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