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4)

넷째 주

by 글쓰는비둘기

넷째 주




화요일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오늘은 재택을 내고 집에서 근무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3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 머리가 핑핑 돌았는데 오늘은 5시간 정도 버텼다. 중간에 한 번 쉬고 일하니 금세 퇴근 시간이 되었다.

점심까지만 해도 코맹맹이 목소리에다 계속 기침이 나왔는데 저녁 즈음에는 많이 회복되어서 퇴근하고 저녁을 먹은 뒤 바로 소설 마무리 작업에 돌입했다.


내일 출근길에, 아님 점심 시간에 등기를 부칠 생각이라 오늘 마무리하고 동네 도서관에서 인쇄할 생각으로 열심히 탈고를 했는데 맞춤법 검사를 하며 다시 쭉 보니 영 마음에 안 든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이번에는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고 나니 왠지 꼴보기 싫어져서 순간적으로 공모전도 내지 말아버릴까, 했다가 충동을 억눌렀다. 중간에 여행도 있었고 몸도 아팠는데 그래도 용케 결말까지 썼으니 응모는 하긴 해야 스스로 끝까지 했다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서관에서 프린트를 하는 김에 책도 두 권 빌려왔다.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제임스 볼이라는 저널리스트의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

프린트한 소설과 책 두 권을 껴안고 집에 왔는데 문득 탈고를 축하하는 의미로 편의점에서 디저트라도 사올 걸 그랬나 싶었다(저녁 아홉 시가 넘어 빵집은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이미 집에 와 버렸으니 휘핑크림을 넣은 디카페인 커피만 한 잔 먹기로 했다. 빵이 정 먹고 싶으면 내일 출근길에 회사 앞에서 크루아상을 사 가야겠다.


커피를 마시며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는데 글이 너무 깔끔하고 쿨해서 질투가 났다. 장류진 작가가 인기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럴 만하다 싶었다. 찾아보니 심지어 엘리트에다 대단한 미인이다(나는 지독한 얼빠에 학벌 컴플렉스가 있다). 글까지 잘 써야 했나?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그건 그렇고 나는 항상 소설에 제목 붙이기를 가장 어려워하는데, 장류진 작가는 모든 작품의 제목이 다른 책이나 노래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도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에서 따온 거라고. 제목에 저작권이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말 그렇게 제목을 짓다니 신기하다.


웬만하면 내가 쓴 제목을 붙이고 싶은데 난 제목 짓기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 매번 골머리를 앓는데 그렇게 만든 제목도 하나같이 영 별로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올 때 서가를 죽 훑으며 제목들을 봤다.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제목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작품을 잘 담아내고 캐릭터를 보여주면서도 근사하게 어필할 수 있는 제목은 어떻게 쓸 수 있으려나.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 역시 제목만 보고 빌려온 책이다. 카피라이팅 공부를 더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반기에 300매짜리 소설을 하나 써냈으니 올해는 출발이 괜찮은 것 같다. 미국도 우리나라도 시국이 너무 흉흉해 솔직히 나라의 미래와 나의 미래가 걱정되고 깊이 생각하면 우울해지지만… 내 삶을 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단 오늘은 감기몸살이 거의 나았고 소설을 한 편 썼다는 점에 감사해야겠다.

1월 즈음 시작할 때는 이 글을 읽게 되는 분들의 평안을 몇 번 빌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정신없이 사느라 잊은 것 같다. 넓은 인터넷의 바다에서 이 글을 만난 분들이 계시다면, 모두 평안하시기를. 한 주가, 하루가 평안치 못하다면 지금 이 밤 시간만이라도 평안하시길.



목요일


제니의 앨범 Ruby를 전곡 무한 반복 중이다.



토요일


영어 회화 학원에 가서 레벨 테스트를 보고 등록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 쓴 것 같은데, 번역가라고 자기소개를 하면 듣는 사람들은 번역가라는 자가 으레 영어의 마스터(?)쯤 될 거라고 짐작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의 스피킹 실력은 변변찮다. 유학은커녕 그 흔한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한 번 다녀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어를 듣고 말하는 환경에 노출될 기회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한국 드라마보다는 해리 포터나 미드를 더 좋아했던 탓에 영어로 된 콘텐츠는 무지하게 많이 봤지만 실상 생활에서 영어를 써 본 적이 없었던 거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우연찮게 번역의 길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들어오고 나니 유학이나 해외 체재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소수다.


나는 심지어 영문과 전공도, 복수 전공이나 부전공도 아니고 대학원에 진학하지도 않았으니 특이 케이스에 가까운 것 같다(심지어 외국인과 연애를 한 적도 없다, 데이트는 몇 번 해 보긴 했지만). 그래서 나는 항상 남들에 비해 영어라는 언어와 그 문화에 대한 경험과 이해도 자체가 심히 떨어질 것이라 여겼고 그게 큰 컴플렉스로 작용했다. 특히나 영어로 중등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과는 이해도의 깊이가 비교할 수조차 없을 것이었다.


물론 토종 한국인인데다 글을 오래 쓴 만큼(부전공이 문예창작이기도 했다) 번역의 목표어인 한국어에 대한 이해도는 내가 더 뛰어난 경우가 많겠지만 출발어를 제대로, 똑바로, 깊이 있게 이해해야 목표어에도 제대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일하면서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영어에 대한 이해도도 많이 좋아졌고 실력이 많이 늘었지만 스피킹은 아직까지 긴장되고 어렵다. 영어로 말할 일이 있으면 여전히 심장이 쿵쿵 뛰고 땀을 뻘뻘 흘린다. 사실 이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데.


문제는 가진 영어의 지식에 비해 스피킹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발화를 하는 동시에 내가 어떤 문법이 틀렸는지(시제라든가 관사라든가 전치사라든가 등등), 어떤 표현을 쓰면 더 좋았을지, 혹은 원어민들이 잘 쓰지 않는 표현방식이라 한국어를 번역한 영어처럼 들리리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린다. 머릿속에서 즉각적으로 검토 및 첨삭이 진행되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얼마나 내 영어가 이상하게 들릴지 의식해 버리니 얼어붙고 마는 것이다.

사실 영어든 한국어든 그런 걸 의식하면 사람이 말을 못 한다. 그러니 내가 말을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레벨 테스트 결과는 좋게 나왔다. 상담을 하며 물어보니 수강생 중에 나 정도의 결과가 나온 학생은 없다고 했다. 영어 모임에서 스피킹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 터라 학원에도 잘하는 사람이 많겠거니 막연히 생각했었다. 영어에 욕심이 있어 1대1 회화까지 들을 정도면 어느 정도 실력자들이 모이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난 내 수준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의 수준인 학생이 없다는 말에 잠시 놀랐으나 생각해 보면 나만큼 영어를 고급 수준으로 하고 싶어하는, 혹은 그만큼의 실력이 필요한 사람도 많지는 않을 듯했다.


순간 멈칫했다. 여태껏 업무도 잘해왔고, 영어를 못한다고 불이익을 본 적도 없고(사실 내게 영어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나 자신 말고는 없다), 불필요한 부분에 큰돈을 쓰는 바보짓을 하는 걸까?


하지만 영어로 말할 때마다 말도 안 되게 긴장하는 건 여전했다. 오늘도 3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테스트를 진행하면서 옷 속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일하면서 어쩌다 화상으로 영어 미팅을 하게 되면 뻣뻣이 굳어 버린다. 영어 모임에서 직업을 소개할 때 번역가라고 말해야 하는 게 좀 부끄럽다. 나보다 영어를 못하지만 말할 때 자신감은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들도 많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등록을 진행했다. 6개월 과정이었다. 이 코스가 시작되면 주 3회 이상을 나가야 할 것이라 말도 안 되게 바빠질 테고 소설 쓸 시간도 빠듯할 터라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살아야 할 것이었다. 운동할 시간도, 친구 만날 시간도 여의치 않을지 몰랐다. 막 시작해서 정신없이 플레이하고 있던 마비노기 모바일도 중단해야 할지도(너무 재밌어서 현생을 잊을 정도다)…. 6개월간은 말 그대로 어학 연수 갔다 생각하고 몽땅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말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자신감을 갖고 싶었다. 아마 내 개인 일상을 희생하면서까지 잘하고 싶은 것 같다.


이런 열정으로 소설을 써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잘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복이다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AI 시대에 왜 이런 거에 꽂혀 가지고는, 싶기도 하다.


잘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좋은 선택일까? 모르겠다.


결국엔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 같다.

음, 그거면 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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