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
지난주 주말 송리단길에 놀러갔다가 독립서점 한 군데에 들렀다.
독립서점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독립서점에는 책방 주인의 성격이 묻어난다. 장소의 분위기는 사실 조용하고 차분하며 아기자기한 곳이 많아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그보다는 공간이 협소하고 다양한 책이 두세 권 정도 갖춰진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대형 서점과는 아주 다른 구성의 책들과 만날 수 있다. 매대에 어떤 책을 올려놓았는지, 서가에는 어떤 책을 꽂아놓았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독립서점을 ‘서점’이라기보다 ‘책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데에는 이런 요소들이 한몫할 것이다.
책방 중에는 독립출판물이나 소형 출판사의 작품이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가게도 있고, 소위 메이저 출판사라 불리는 출판사의 책들이 꽤나 많은 경우도 있다. 나는 독립서점에 가면 독립출판물을 더 들여다보는 편이긴 하지만 메이저 출판사의 작품이라 해도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나 주요 매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컬렉션을 볼 수 있다. 대형 서점의 수많은 책들 사이 파묻혀 있던 보석같은 책들을 책방 주인들이 골라낸 것이니 흥미로울 수밖에.
책방 주인이나 직원들의 코멘트가 달린 메모지가 남겨져 있는 경우도 많은데 다른 이들이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태도로 책을 대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대형 서점에서는 책을 사오는 일이 별로 없는데(책은 무겁고 부피가 있기 때문에 치밀하게 고민하고 엄선해 인터넷으로 사는 편이다) 독립서점은 어디를 가나 부디 계속 이곳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꼭 한 권씩은 들고 나오게 된다.
이번에는 박지이 작가의 ‘불안을 섬기는 세계에서는 확인까지가 사랑이라‘라는 산문집을 들고 왔다. 꼭꼭 씹어낸 것 같은 섬세한 문장이 좋다.
그러고 보면 우리 동네에도 약간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독립서점이 있다. 한때 달마다 갔었는데 그새 찾지 않은지 꽤 됐다.
이번 카드결제일이 지나면 다시 가 보아야겠다. 부디 그곳이 아직 남아 있길 바라며.
지난주에 라넌큘러스를 한 단 샀다. 봄꽃이 집에 들어오니 화사해졌다. 이미 피어난 꽃 말고도 꽃봉오리가 서너 개 있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모두 고개를 꺾었고 하나만이 살아남아 봉오리를 틔우려 한다. 이미 피어 있던 꽃들은 져 가는데 봉오리 딱 하나가 여태 남아 꽃을 피우려고 한다는 것도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키우고 있는 식물의 가지를 잘라 물꽂이를 할 때도 모든 가지에서 뿌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씨앗을 심어도 모든 씨앗에서 싹이 트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도 비슷한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든 일에서든, 씨앗을 여러 개 뿌려 두면 그중 한두 개에서 싹이 난다. 결코 모든 씨앗이 싹트지는 않으며 그렇다고 싹이 하나도 트지 않는 경우도 별로 없다. 몇 개 뿌리다 보면 한두 개에서 싹이 튼다. 대체로 그런 듯하다.
싹이 틀 만한 곳에서 틀 때도 있고 전혀 생각지 못한 데에서 틀 수도 있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죽을 때도 있고, 햇볕을 쬐어야 하는데 통풍만 열심히 시켜주는 바람에 싹트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싹이 터서 무럭무럭 파릇파릇 자라다가도 어느 날 보면 고개를 떨구고 있기도 하다.
결국 씨앗이 싹을 틔우고 싹에서 잎이 자라고 하늘거리던 줄기가 목질화되어 굵직하고 단단해지고 가지가 나고, 작으나마 나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자라 있는 나무들이 우리 곁에 있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고 그런 나무들이 숲과 산을 이루고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또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진짜 나무도 그렇고, 내 옆의 사람도 그렇고, 내가 하는 일도 그렇고, 다 그렇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연차를 내어 건강 검진을 받고 왔다. 검진 결과는 이 주 후에 나온다고 했다. 인간의 몸뚱이를 끌고 사는 것에는 정말 번거로운 일이 많다. 먹여주고 씻겨주고 재워주고 안 아프게 돌봐 줘야 하고.
건강 검진은 오전에 끝나 엄마와 잠깐 놀고는 친구를 만나 해방촌에서 저녁을 즐겼다. 남산은 벚꽃과 매화와 개나리와 진달래가 모두 피어 기이하면서도 예쁜 광경이었다.
완연한 봄이다.
토요일에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가서 민화전을 보고 왔다.
그러고 보면 난 한국 사람인데 우리나라 미술보다 서양 미술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서양회화 작가들은 인상파 화가만 해도 이름을 줄줄 댈 수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비해 조선시대 작가들은 누구나 아는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밖에 없는 것 같다. 심지어 화풍을 구분하는 데에도 자신이 없다.
민화전에 가본 것도 처음이었는데 호랑이나 까치를 그린 그림보다 책이나 부채를 그린 그림이 훨씬 신기했다. 동양의 정물화란 이런 것이었구나, 새삼 그런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따지고 보면 서양의 정물화와 동양의 정물화는 천지차이로 다른 것 같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것을 전하는 방식, 바라보는 시각, 그림을 그리는 도구 등 거의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딴판인 듯하다. 그나마 붓이라는 재료는 비슷하니 오히려 그게 신기할 지경이다.
글자를 그린 민화는 한자를 장식적으로 꾸민 것이었는데 역시 서양의 캘리그라피와는 달라도 한참 달라서 동서양의 사고방식이 이다지도 다른 것이 계속해서 신기할 따름이었고, 또 역시 이렇게나 다르니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이렇게 힘들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딴 소리지만, 영어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한국어를 말할 때 사용하는 사고방식과 영어를 말할 때 사용하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다른지 매번 절실히 느끼곤 한다. 그림에서도 그런 것이 고스란히 보이니 일견 당연하다 싶다가도 새삼스럽게 다시 바라보게 된다.
여기저기서 영어 공부를 오래 해오다 보니 영어를 제법 잘하는 한국인을 꽤나 많이 만났는데, 희한하게도 분명 영어로 말하고 있고 유창성도 있는데 묘하게 한국어를 번역한 것 같은 영어다라는 느낌을 항상 지울 수 없었다. 영어란 무엇인가를 따지고 올라가자면 외국인의 영어라 해서 영어가 아니라고 할 순 없겠지만, 뭔가 영어다운 영어인가를 묻는다면 그보다는 한국어스러운 영어에 가깝달까.
영어를 그토록 많이 배우고 써 온 이들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영어로 소통할 때에도 한국어적인 사고방식을 이용해서 말하게 되는가보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게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동서양의 사고방식이 판이하게 다르고 그 사이를 넘나들기는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이야기만 많이 듣고 방문은 처음 해 보았는데 아름답고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는 곳이었다. 진지한 곳이고, 많은 생각이 들어간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사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그건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아는 것이긴 하다.
앞으로 한국 전통화를 다룬 전시가 더 많아지길 빈다.
일요일인 오늘은 장장 삼 주만에 겨우 다시 단골 카페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간 봄나들이를 다니느라 주말이 바빴다. 책도 많이 못 읽었다. 언제나 그곳에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돌아갈 수 있는 어딘가가 있다는 건 참 감사할 일이다.
비가 내리면서 꽃이 얼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될 만큼 춥지만 다시 따뜻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