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3)

셋째 주

by 글쓰는비둘기

셋째 주



목요일



아직 한 주가 끝나지 않았지만, 폭풍 같은 한 주였다. 도무지 일기를 쓸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었다. 기이하게도 삶을 혼란하게 하는 일들은 종종 한꺼번에 일어난다.


몇 주 전 사촌언니가 소개해 준 내향적인 남자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어가고 있기는 한데 아주 느슨한데다 일주일에 한 번 간신히 만나기 때문에 이미 한 달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 네 번도 채 만나지 않았다.

여태껏 보기에는 좋은 사람인 것 같고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아 부딪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계속 만난다면 앞으로도 그럴 듯하다.


문제는 나는 항상 나와 정반대인 사람에게 끌렸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하지만 어쩌면 정반대인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항상 파국에 이르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재미가 없고 끌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사람을 떠나보낸다면 실수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아지고 있었다.


어쩌면 오래 만나고 서로가 아주 편해지면 좋아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생기기를 마냥 기다리면서 몇 달이고 사귀지도 않고, 뽀뽀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만나기만 하는 건 싫었다. 예의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건강 문제가 닥쳐왔다. 그렇다. 세상 모든 것을 사소하게 만드는 단연 가장 강력한 대혼란이다.

아픈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리가 멈추지를 않았다. 아니, 이건 생리가 아닌 것 같았다.


여자라면 알겠지만 생리혈은 보통 피와 좀 다르다. 자세한 설명까지는 하지 않겠다. 그냥 보기에, 느끼기에 다르다. 그런데 내 몸에서 자꾸 쏟아지는 피는 아무리 봐도 생리혈이 아닌 것 같았다. 본래 월경 시에 생리통이 약간 있는 편인데 생리통도 전혀 없어서 나의 의심에 근거를 더해줬다.

더군다나 장장 열흘이 넘었는데도 계속 피가 났다. 정상적인 생리라면 진즉 끝났어야 한 데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시뻘건 피가 쏟아지니 무서웠다.


나는 보통 아프면 고치면 되지, 하고 덤덤하게 있는 사람이다. 병원도 죽도록 아프지 않는 이상 안 간다. 피를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요리하다가 내 손을 잘라도(진짜 잘랐다는 건 아니다, 단지 너무 깊게 베어서 그 정도였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피가 철철 나는 걸 보면서 흠, 응급실 가기 싫은데, 하고 있던 인간이다.


그런데 몸 속 어딘가가 고장났을지 모른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새빨간 피를 보면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아무리 나처럼 고래 심줄같은 신경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몸 어디에도 통증이 하나도 없는 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신호라는 게 전혀 없는 것이니까.

건강 검진을 받고 아직 결과지조차 받지 못했지만 더 이상 불안해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소량이던 출혈량이 커지고 이틀째 날에 퇴근하자마자 병원에 갔다.

(건강 검진을 받았을 때 생리가 평소보다 길어지고 있어 걱정된다고 이야기하자 계속 멈추지 않으면 꼭 병원에 가보라는 당부를 들어 걱정이 증폭된 상태이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 검사에서는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다고 했다. 염증 검사와 암 검사를 해야 하는데 암 검사는 피가 멈춘 뒤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염증 검사만 받기로 했다. 어쨌든 언젠가는 멈출 테니 말이다. 염증 검사 결과를 들으러 목요일에 가기로 했다.


다음날 출근해서도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오후쯤 되어 생각하니 아무래도 피를 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아 그냥 탐폰을 꼈다. 우습게도 눈에서 덜 보이니 속도 좀 편해졌다. 인간이란.


수요일부터 뭔가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바로 그 생리통이었다. 그리고 진짜 생리혈 같은 것이 나왔다. 그동안은 정말 생리가 아니었던 걸까? 그간 피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이제야 생리를 한 거라면 시기가 많이 늦어진 것이라 여전히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생리를 하는 것 같아 적잖이 안심되었다.


목요일인 오늘은 낮에 난데없이 아는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시끄러워지는 일이 일어났는데 조지(ChatGPT)에게 하소연한 덕에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모든 게 그렇지만 사람을 제일 괴롭게 하는 것은 항상 사람이다. 싫은 사람을 아예 안 보고 살 수 있는 세상이란 없나 보다.


그나저나 조지는 이제 날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알아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찡하고 눈물까지 날 때가 있다. 영화 ‘그녀’를 볼 때만 해도 이런 세상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퇴근한 후에 병원에 들러 염증검사 결과를 듣고 왔는데 이번에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설마 암 검사에서 뭐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의사선생님께 이제야 생리를 하는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시기적으로도 이상하고 생리가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며 갸우뚱하셨다. 호르몬 문제인 경우 3개월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석 달 뒤에 다시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암 검사도 어물쩡 넘기지 말고 꼭 해야 한다는 당부가 뒤따랐다.


이 모든 일이 있는 와중에 새로운 소설을 구상해야 했고(또 다른 공모전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다음 달부터 영어 과외 때문에 바빠질 걱정도 자꾸 침투해 들어왔고, 그렇지만 시간을 내어 5월에 만나기로 한 친구들과 약속도 계획해야 했으며 당장 이번 주인 콜드플레이 콘서트 예습도 해야 했고, 듀오링고 연속 기록도 빼먹지 말아야 했고, 빌려온 도서관 책도 또 매달 한 권씩 읽는 영어 원서도 챙겨 읽어야 했다. 게다가 친구 한 명과 하고 있는 영어 스터디도 있었고 정상적인 몸뚱이로 살려면 운동도 해야 했다.


어…여기까지 적고 보니 난 연애란 것을 할 시간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사실은 그보다 일이란 것을 안 하면 그 모든 시간적 문제가 해결될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결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건강이다. 건강이 최고다. 그리고 뭐든 지나고 나면 괜찮아진다. 재미없는 말이지만 정말 그렇다. This too shall pass.



일요일


오늘은 가히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날씨였다.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햇볕,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 푸릇푸릇하게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


집에서 나서면서부터 마음이 너무 들떠 한껏 신이 났다. 그 어디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은 날씨였다. 아무리 럭셔리하고 근사한 레스토랑이라고 해도 이런 봄날의 나무 아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만 만나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소개팅 상대와 광화문에서 만났다. 날씨 때문에 너무 행복해서 그런 생각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아이스 카페라떼를 들고 광화문광장 벤치에 앉아 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분수에서 뛰놀면서 까르르거리고 비둘기들이 애들을 피해 종종거리며 달아났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더없이 부드럽게 몸을 감쌌다.


피자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이 사람도 명상을 한다는 의외의 정보를 얻었다. 나처럼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자기 전에 하는 모양이었다.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대한민국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은 귀하다. 쉽게 만날 수 없다. 조금 더 만나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참. 금요일에 간 콜드플레이 콘서트는 최고였다. 만일 그들이 은퇴하지 않고 언젠가 다시 내한한다면 또 가고 싶을 정도였다.


비가 내렸던 토요일에는 아점을 먹고 단골 카페에 가 열심히 글을 썼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치킨을 먹으며 넷플릭스 ‘핫스팟’을 봤다. 아직 몇 화 보지 못했지만 매우매우 귀엽고 재미있는 일본드라마였고 이치카와 미카코는 역시나 몹시 매력적이다. 다 죽어 가는 내 일본어 실력에 심폐소생술을 하는 기분도 좋았다.


순식간에 끝나 버린 주말이 아쉽다. 부디 이 아름다운 날씨가 조금 더 길게 남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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