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주
화요일에 비가 무진 쏟아지더니 수요일부터 환상적인 봄날씨가 펼쳐지고 있다. 날씨와 기분이 어찌나 이토록 정직하게 비례하는지 매일 이 정도로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오늘은 점심에 직장 동료들과 포케를 사 들고 서울숲에 가서 먹었다.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햇살이 그 위로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포케를 먹었다. 이런 날에 사무실에 돌아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몹시도 부당하고 억울하게 느껴졌다.
서울숲에는 귀여운 강아지들이 너무 많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도 어린이대공원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베이글 샌드위치를 사 가서 저녁을 공원에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베이글집의 문이 닫혀 있었다. 대신 지나가며 궁금해하기만 했던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를 사 갔다.
어린이대공원 벤치에서 노을과 잔디밭, 그 위에 도란도란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햄치즈 샌드위치가 담긴 종이봉투를 열었다. 에어팟으로 듣던 음악을 끄니 사람이 없지 않았음에도 공원은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바람에 점잖게 흔들리는 나뭇잎들 부딪치는 소리, 종을 알 수 없는 새소리가 들렸다. 사람들 목소리는 다소 멀찍이서 두런두런 들렸다. 오렌지빛 노을조차 고요한 기분이었다.
샌드위치를 아주 천천히 먹었다.
점심에 친구들을 만나 같이 식사를 했다. 서울역 근방에서 만나 스파게티와 라자냐 같은 것들을 먹고 카페에 가서 타르트와 케이크도 먹었다.
저녁을 먹지 않고 헤어졌는데, 많이 먹어서 배부르기도 한 데다 좋은 이야기만 나누었는데도 무언가 감정이 차분하지 못한 기분이 들어서 집에 오는 길에 자양역에서 내렸다.
본래 뚝섬유원지역이었던 자양역은 언제부터인가 이름이 바뀌었다. 체감상 이름이 바뀐지 일 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뚝섬유원지역은 7호선인데 이쪽 지리에 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2호선 뚝섬역과 혼동하지 않도록 두 번 이야기했어야 했다. 이름 자체는 뚝섬유원지가 더 예쁘지만 그래도 바뀐 게 나은 것 같다.
자양역에서 내려 남산타워를 등지고 롯데타워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한강을 따라 쭉 걸으면 강변역이 나온다. 시간을 정확히 재 보지는 않았지만 삼십 분에서 사십 분가량 걸어야 한다. 나는 잘 걷는 사람이라 그 정도는 끄덕없다.
오늘은 남산타워 곁으로 보이는 일몰의 해가 아름다웠다. 해를 보면서 걷는 방향이 아니라 조금 아쉬웠다.
날이 좋아 뚝섬유원지는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요즘 바람이 강한데 춥지는 않았으려나 약간 궁금하다. 내가 주로 걷는 오솔길이 공사로 막혀 있어 하는 수 없이 인파를 뚫고 공원을 걸었다.
땅의 사람들과 공중의 날벌레 무리(으윽)를 부지런히 헤치며 걷다 보니 드디어 조용하고 평화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걷는 속도를 늦추고 강바람을 맞으며 심호흡과 함께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복잡해진 감정들이 바람과 함께 내 몸을 타고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내 감정은 내가 만난 사람들이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준 것이니 내가 떠나보낼 수도 있다.
감정도 생각도, 실은 몸의 반응이자 뇌의 반응일 뿐이다. 생각은 ‘하다‘라는 동사를 주로 써서 착각하게 되는데 사실 감정과 마찬가지로 ’드는’ 것이 대부분이고 내가 능동적으로 이끌어내어 ‘하는‘ 생각은 많지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거의가 ’드는‘ 것들이고 어떤 현상에 대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그 생각으로 촉발되는 감정도 그렇다.
명상하듯 걷다 보니 오래 걸리지 않아 감정들이 착 가라앉고 평안해졌다. 다시 즐거운 마음이 되어 Surfaces의 노래를 들으며 한강변을 걸었다.
강변역에 다다르니 역전의 가판대 중에 꽃을 싸게 팔고 있는 곳이 있었다. 노란색 장미 세 송이와 커다란 유칼립투스 한 단을 고르니 팔천 원이었다.
꽃다발을 들고 집까지 오는 내내 코끝에 꽃향기가 맴돌았다. 귀가하자마자 끝단을 자르고 물을 올려 주었다. 유칼립투스는 커서 두 단으로 나누었다. 꽃병 하나는 책상 위에, 하나는 침대 곁에 놓았다.
내일 아침에 퀴노아와 병아리콩을 넣은 샐러드를 먹고 싶어서 퀴노아와 콩을 삶았다. 집안에 곡물을 삶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 찼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아침에 일어날 리가 없다. 점심으로 먹어야겠다.
오늘 자기 전에는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을까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마리아’를 봤다.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영화였다.
마리아 칼라스에 대해서는 유명한 오페라 가수이며 여자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영화를 보니 과연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였구나 하는 감상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인가 하는 새삼스런 자각이 들었다.
엄청난 재능과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개인사를 끌어안고 사는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런 인생을 살면 어떤 기분일까.
지극히 평범한 나는 지극히 비범한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다. 그들 또한 그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모두 찰나의 우주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궁금해하고 만다.
아참, 오늘은 좋은 일을 하나 했다.
역에 내렸는데 승강장 벤치에 누군가의 휴대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뚜껑이 있는 분홍색 인조가죽 케이스에 덮여 있었다. 아마도 나이 있는 여자분의 휴대폰 아닐까 싶은 모양새였다.
지하철역이니 CCTV도 있을 것이고 누가 그걸 들고 갈 것 같지도 않았다. 금방 주인이 가지러 올지도 몰랐다. 조금 고민하다가 개찰구를 나갔는데 계속 맘이 쓰여서 결국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역에 전화를 걸었다. 그냥 두고 가면 종일 마음에 걸릴 것 같았다. 다행히 역무원이 즉시 전화를 받아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그새 누가 들고 가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다음 주는 연휴가 끼어 있다. 온갖 일정이 가득해 빡빡할 터이지만 기대된다. 부디 날씨가 좋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