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주
어제는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읽다가 새벽 네 시에 잤다. 소설을 읽느라 그런 시간에 잠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새로운 남자친구와 연애를 한지 이제 딱 석 달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 가슴 속에 울컥거리며 솟아오르는 강렬한 애정을 (아마도) 네 번 정도 느꼈고 헤어지고 싶은 충동은 (아마도) 열네 번 정도 느꼈다. 용케 아직까지 한 번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만세.
(다시 생각해 보니 애정을 느낀 수가 네 번보다는 많은 것 같긴 하다. 다행이군)
이 인연과 이 사람이 너무나 특별하고 운명적으로 느껴지던 시기는 이미 벌써 지난 것 같다. 나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는 걸 너무 잘하는 것 같다. 쓸데없이. (그런데 나 자신은 객관적으로 못 본다)
가장 오래 했던 연애는 이 년 정도였을 것이다. 현재의 남자친구를 빼고 가장 최근의 연애는 석 달이 되지 않아 끝났다(그 이후에도 같은 사람과 일이 년을 거쳐 이러쿵저러쿵한 일이 있었으나 사귐이 끝난 것은 끝난 것이다).
실은 내가 했던 연애라는 것이 한 번의 케이스를 빼고는 대부분 그 정도였다. 나는 연애를 끝내는 데에는 아주 기막힌 재능이 있다. 친구 관계에는 목을 매고 집착하면서 남자와의 관계에는 순식간에 칼을 빼 든다.
내가 지독히 병들어 있다고 생각한 데에는 우울감뿐 아니라 이것도 한몫했다. 난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연애고 결혼이고 남들은 쉽게도 하는데 나는 무언가 고장나 있어서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정의하는 바에 따라 판단해 보면, 나는 연애는 몇 번 해 봤지만 사랑이란 것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기준에 따르면 아마 사랑이란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80억 인구 중에 1억 명, 아니, 백만 명도 안 될지도.
그럼에도 언젠가는 그 중 하나가 되고 싶기도 하다.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려면 사실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내게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무의식적으로 사귀는 사람에게 그런 사랑을 기대해 버리곤 했지만, 또 지금도 하지만(다만 빈도는 많이 줄었다),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되는 거였다. 파트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일 뿐더러 거기 기대기 시작하는 순간 외부의 애정에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파트너가 그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에 무너지고 만다. 지지대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삶이란 게 그렇다. 적어도 내겐 여태까지 그랬다.
내게 진정한 사랑을 주려고 매일 명상을 하게 되었다. 그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해 보려는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 굴러가긴 한다. 덜컹덜컹. 내게는 의지가 있고 상대에게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 사랑의 언어는 좀 다른 것 같지만, 안 맞는다고 느낄 때도 종종 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남자친구가 내게로 향하는 애정은 꾸준하고 변함이 없어서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는 불쑥불쑥 감정적으로 이별 충동이 들 때마다 ‘석 달까지 버티자’라고 되뇌었는데 앞으로는 ‘육 개월까지 버티자‘라고 해야 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안정형이 되어 있을지도.
죽어도 나아질 것 같지 않던 우울증도 고쳤는데 이것도 나아지겠지. 힘들 땐 다 덮어놓고 명상이나 열심히 하자. 그렇게 혼자 생각한다.
불안정한 기분이 들어 정서 상태가 많이 흔들리면 이따금 부모를 원망한다. 내 부모도 자신들의 부모를 원망할지 모른다. 음, 한 쪽은 확실히 원망할 것이고 한 쪽은 이제 잘 모르겠다.
다른 생각을 하자.
미니멀리즘 마인드셋을 갖추려고 정리에 관련된 책을 이것저것 읽고 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 유용한 한 줄을 얻었다.
무엇을 버릴지 생각하기보다 어떤 공간을 가지고 싶은지 생각하면 정리가 쉬워진다고.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무얼 버릴까 들여다보다 보니,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물건도 다시금 예뻐 보이고, 쓸 만해 보이고, 아직 치우기는 아깝고, 뭔가 더 정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들면서 되레 버려는 게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대목을 읽고 내가 어떤 공간에서 생활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를 가만히 상상해 보니 그 모든 물건이 없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이런 소소한 생각의 전환이 때로는 참 어렵고 참 놀랍다.
그런데 HSK 교재는 버릴지 말지 참 고민되네.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 그야말로 작열하는 더위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년엔 정말 더 더워지고, 후내년엔 더 더워지고, 그다음 해엔 더 더워지고, 그렇게 더더더 뜨거워지는 걸까? 매해 여름이 오는 것 자체가 재해가 되어 사람이 죽고, 가축이 죽고, 벼가 죽고 밀이 죽어, 식량이 모자라게 되고 전쟁을 하게 되고 화폐 가치가 폭락해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해수면이 상승해 부자들은 태백이라든가 대관령이라든가 아님 페루나 스위스로 이사를 가고 세계의 인구는 빈곤과 역병으로 반토막이 나고 사라진 40억명의 자리는 400만 대의 로봇이나 AI가 채우게 될까?
그렇다면 되도록 빨리 비트코인이나 금을 사 놔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것이 소용이나 있을까? 10년쯤 뒤에 열사병으로 갑자기 꽥 죽어버린다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의 몸뚱이는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가서 예쁜 것들을 구경하고 엽서를 사들이고 타코와 케사디야를 먹고 집에 돌아와서는 에어컨을 켰다.
나의 직장 동료 중에는 입버릇처럼 “(지구를 위해서는) 인간이 죽어야 한다”라고 외치는 친구가 있는데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아마 맞겠지.
기후를 걱정하면서 나는 행복한 주말을 보냈다. 인간이란 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