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
요즘 꽤나 자주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상상을 한다.
나는 항상 이상적인 관계를 꿈꿀 때 대화로 아주 깊은 수준의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를 그리곤 했다. 밤새 수다만 떨어도 즐겁고 끝이 없이 말할 수 있고 이 사람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도 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그런 느낌을 주는 관계.
지금 남자친구는,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두 번 적었던 것 같은데 얼마나 말이 없는지 묘사해 보자면 식당이나 카페에 앉았을 때 내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입을 다물면 그저 침묵만이 계속될 정도다. 남들이 보면 영락없이 싸우고 냉랭한 커플로 보일텐데 사실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통화를 할 때도 그렇다. 전화상으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백을 채워야 오해가 발생하지 않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대면 시보다 통화 시에 말을 더 많이 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전화상으로 그냥 침묵이 흐를 때가 많다. 가끔 가다 밥은 뭐 먹었느냐는 질문을 하고 나는 대답하는 정도. 그것도 그에게는 대화능력을 간신히 쥐어짜 내어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사람과 애초에 어떻게 만날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답한다면 말이 없어도 얼굴은 다정하고 분위기가 부드럽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는 대화로 즐거움을 얻는데 대화가 없으니 할 일이 없고, 카페든 식당이든 가면 아무 할 일이 없어서 책만 읽게 된다.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연인을 꿈꾸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좀 더 가까워지면 말문이 트이겠지 했는데 8개월째가 되어도 그대로인 것을 보면 이젠 모르겠다.
여러 노력을 해 보았지만 나 혼자 애쓰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본인은 아마 말없는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내게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끝인 듯해서 이제는 별로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손은 항상 잡고 있지만 대화란 것은 거의 전무하다.
가끔 가다 대화란 것이 이루어져도 나와 전연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이것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말을 잘 하지 않아도 이따금 꺼내는 말들이 나와 깊은 소통을 나누는 부분이었다면 아마 이런 건 문제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대화를 내가 이끌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버겁다. 대화뿐만이 아니다. 식당 선정, 메뉴 선택, 그 외 말할 수 없는 사소한 것들부터 중대한 것들까지 모든 결정이란 결정은 내가 다 내려야 한다. 내게 모든 책임과 결정을 떠밀고 자신은 공주님처럼 가만 있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사람이 싫어진 것은 아닌데 관계를 유지할 힘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그와의 관계에서 얻는 안정감과 위안이 분명 있기는 할 터다. 그것이 좋아서 아직까진 이별을 상상만 해 보고 실행에 옮길 행동력까지는 다다르지 않은 거겠지.
이만큼 다정하고 헌신적이면서 나만 바라보고 순한 사람을 언제 또 다시 만나겠느냐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그런 사람을 굳이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한 문제를 인지하고는 있는데 아직도 헤어지지 않는 것은, 나는 이것을 아직 이별할 이유라고까지는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어떨 땐 나 자신을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