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연 Mar 06. 2022

현실 부적응자의 세계 방랑기

나는 그때 바람이라도 잡고 싶었다.

프롤로그


이곳저곳 지나쳐 온 타향살이 횟수가 20년이 되어간다. 스무 살 적 호기심에 들떠 겁 없이 돌아다녔다. 바닷속 산호는 정말 천연색으로 살아서 움직이는지, 사막에서 보는 은하수는 어린 왕자가 본 것처럼 아름다울지, 유럽 황금 궁전에는 왕자와 공주들만 사는지, 아님 미국의 아메리카 드림은 나도 이룰 수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이 궁금했고 모든 것을 직접 보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입시만 끝나면, 어른만 되다면 지루한 교과서는 다시 들여다보지 않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상의 신비를 찾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을 졸업해도 내 인생은 비루하기만 했다. 삼류 학벌과 애매한 능력으로는 제대로 취업을 하기도 힘들었고 가까스로 구한 직장의 월급으로는 평생 비행기 한 번 못 타볼 운명이었다.

기나긴 입시 생활을 끝내고 그렇게 기다리던 성인이 되었지만 주위의 어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어른이기에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옳은 선택을 결정할 줄 알았던 그들의 실상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직장이라는 곳은 소명을 실천하는 곳이 아니라 박봉의 노예들을 편하게 관리하기 위한 감옥일 뿐이었다. 매일같이 출근하는 사무실은 입시 지옥의 교실보다 더 냉랭했고 상사들은 간수처럼 표독한 얼굴로 고함을 지르기 일쑤였다. 고된 업무와 불행한 직장 선배들에게 시달려 피폐해진 하루는 퇴근 시간 6시가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최신 신입 사원에겐 퇴근을 위한 눈치 작전도 사치다. 왜 늘 과장님과 부장님들은 퇴근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질 않는지.... 하루의 고된 수감 생활을 끝내도 집에는 갈 수 없다. 지루한 퇴소식을 거쳐야 한다. 상사의 비난과 면박에 마음이 다친 선배들은 매일같이 회식을 했다. 역시나 신입 사원에게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근처 고깃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술잔을 돌려 마시며 서로를 위로하거나 취중 푸념을 풀었다. 그렇게 술기운을 빌어 그날그날 서운함의 고백과 대 화해의 드라마를 연출하지만 다음 날 해가 뜨면 힐난의 화살이 다시 쏟아져 내린다. 직장인의 진짜 비극은 어제의 비극이 다시 반복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굴레 속에서도 다시 출근하는 그들은 타인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는 관대함을 가진 걸까?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본능적 비굴함일까? 그때의 나는 정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모순의 굴레 속에 사는 그들이 때로는 한심하고 때로는 애처로워 보였다.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그들의 세상살이가 달리 보인다. 화려한 보상이나 영예가 없어도 변변치 않은 일상을 묵묵히 이어 나가는 그들은 내가 동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삶의 담대함을 가진 구도자들이다. 나는 인생 선배들처럼 소주 한잔에 삶의 고단함을 씻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처럼 통장에 찍히는 월급 숫자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가끔은 번듯하고 안정된 삶이 부럽기도 하지만 정해진 틀에 갇혀서 남이 보기에 좋은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등식에 수긍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처럼 인내의 지혜가 없어서 무모했고 순응의 용기가 없어서 이탈했다. 그리고 외국 노동자로서 살아온 나의 이력은 정형화된 한국의 잣대로 사회 부적응자 아니면 중도 포기자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나잇살을 먹고 나니 그 매몰찬 낙인에 나도 수긍이 간다.


나무처럼 척박한 환경이라도 한 곳에 뿌리내려 올곧이 내 자리 만드는 것은 일생을 바쳐야 하는 중대한 일이다. 볕이 따뜻하고 흙이 포근해서 뿌리내리기 좋은 날도 있지만 험한 폭풍우가 지나갈 때는 몇 해를 지나 뻗은 가지를 잃을 수도 그루터기가 통째로 뽑힐 수도 있다. 아무리 궂은날이 이어져도 나만의 삶터를 만들려면 묵묵히 이겨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재능도 노력도 없다는 민망한 고백을 한다. 세상의 반을 여행하고 내 인생의 반을 돌아보니 이야기보따리 빼고는 남은 게 별로 없다. 정답을 비켜 살아온 배짱이 인생이 누군가에게 모범이 될 순 없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펜을 든다. 바람을 따라다닌 시간을 돌아보니 애매한 재능과 평균 미달의 이력으로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행운처럼 만난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힘들 때마다 보잘것없는 나에게 아무 이유 없이 손 내밀어 준 세상의 많은 분들께 이렇게 글로 나마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같은 이유로 삶의 무게에 눌려 목적지를 찾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 숨을 돌릴 여유를 찾기를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