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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연 Mar 06. 2022

유리도시

그러나 정작 나는 섹스 앤 더 시티가 방영을 시작한지 한참을 지나서야 뉴욕 친구들의 입소문을 듣고 알게 되었다. 지나 다니며 광고판을 보았지만 한국인 특유의 유교끼가 남아서 Sex라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단어가 공개적으로 쓰여진 것에 호기심 보다는 거부감과 민망함만 들었었다. 

패션을 전공한 나에게 패션잡지에서 본 뉴욕은 첫 눈에 반한 운명의 도시였다.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이지만 세계의 수도는 뉴욕이라고 불릴만큼 뉴욕은 부와 명예의 상징이자 동서양을 불문하고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도시로 꼽힌다. 뉴욕의 화려한 명성은 월스트리트의 부를 쫓는 은행가들과 세계 최고의 도시에서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되겠다는 영화, 패션, 음악등 각종 아티스트 지망생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자 4대 패션쇼의 성지인 뉴욕은 모든 영화 주인공들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길거리 아티스트가 하룻 밤 사이에 신데렐라로 등극한다는 소문까지 보태어져 꿈과 희망의 도시가 되었다. 그 소문은 돌고 돌아 먼 한국에까지 퍼졌고 패션 지망생인 나에게 뉴욕은 오즈의 도시처럼 환상과 신비로 가득차 보였다. 


나도 그 도시에 도착만 한다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 지고 평생의 행복을 보장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여건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국의 생활이 힘들수록, 나의 막연한 환상은 신념이 되었다. 전문대 졸업 후 허드렛 일을 하며 간신히 모은 돈으로 학비와 편도행 여비를 마련한 후 수중에 있는 돈은 200만원 밖에 안 되었다. 당시 맨하탄에서의 작은 스튜디오 월세가 100만원 대인 걸 감안하고 나의 영어실력이 아직 미흡한 걸 고려하면 턱 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뉴욕의 마법에 걸린 나는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했다. 도시 외곽에 룸메이트랑 산다면 월세는 반값으로 낮출 수 있고 생활비를 아껴서 3개월만 버틴다면 뉴욕 요정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은 IMF를 맞으며 뉴스에서 들리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평범한 가장의 자살이었다. 갑작스런 외환위기로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했고 실업률은 너무나 높았다. 어쩌다 실리는 구인 공고를 보면 주 6일 근무와 야근은 기본 옵션인 노예 계약들 뿐이었다. 이 마저도 실업률이 너무 높아 서로 노예를 하겠다며 경쟁률까지 높았다. 변변찮은 나의 능력으로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수중에 돈은 없어도 젊음이라는 밑천과 열정이라는 투자를 쏟아 붓는다면 신이 나의 노력에 감복하여 기적을 내릴 것이기에 … 뉴욕에서의 나의 성공과 부귀영화는 약속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이상과 현실은 땅과 하늘 차이 아니면 반지하 단칸방과 랜드마크 펜트하우스 차이 ....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뉴욕은 공항을 벗어나자 공장지대처럼 허름하기만 했다. 마천루로 지어진 궁전 같은 맨하탄의 모습은 같은 뉴욕에 도착 했어도 신기루처럼 멀리서 지켜 봐야만 했다. 친구 지인인 한국인 교포의 집에 하숙으로 들어 갔지만 오래된 나무 판자집은 걸을 때마다 끼익거리며 공포영화 배경음 소리를 내고 작은 전화 통화도 여과 없이 들렸다. 매일 이용해야 하는 지하철은 낡은 게 문제가 아니라 역과 차량에서 진동하는 악취 때문에 적응이 쉽질 않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한 영어가 막상 현지에 도착 하니 하나도 통하지가 않았다. 현지인의 빠르고 복식호흡이 섞인 굵은 발음은 수능 듣기평가 영역보다 어려웠다. 게다가 뉴욕의 마법에 홀려 뉴욕에 온 바보는 나만이 아니었다. 네팔, 미얀마에서부터 루마니아, 러시아, 세네갈 등 전 세계에서 모인 다국적 인종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구사하는 영어는 모국어의 억양과 섞여서 외계어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고국을 떠나 말과 문화가 낯선 타국에서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고된 노동직이나 허드렛일이다. 백여년전 망국의 한국을 떠나 온 초기 미국 이민자들 대부분은 사탕수수 밭에서 일을 했고 근대에 온 한국 이민자들의 수준이 나아진 게 주로 세탁소 아니면 식음료점 같은 노동 시간이 긴 업종이다. 외국인이 아무리 엘리트 계층이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어도 타국에서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건 상위 1%의 재능을 가진 능력자들에게나 해당 되는 이야기다. 자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민자는 그저 대도시의 그늘에서 허드렛일을 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 나도 그 수많은 비주류중의 하나였고 나의 암울한 현실처럼 빛 하나 없는 쪽방에서 꿈을 키웠다. 철이 없었던 걸까? 뉴욕의 마법이 강력했었던걸까? 안면부지의 뉴욕 사람들을 부딪히며 뉴욕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1년 전만에도 뉴욕 입성의 꿈은 요원할 것 같았는데 내가 뉴욕에 있다니, 절반의 소원은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를 다니며 집 주변 지리와 대중교통 이용이 익숙해 지자 일자리를 알아 보기 시작했다. 나에게 남은 기한은 딱 3개월이기에 하루가 급했다. 무료로 배포 되는 한인 신문에 난 구인난을 매일 같이 확인하며 나의 뉴욕 생명연장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전화 통화로 몇 마디를 섞지 않아도 어리숙한 타지인 냄새가 풀풀 나는 나를 반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을 애태우며 보내는데 사건이 터졌다. 비행기 타기 전 한국에서 모든 건강검진과 충치 치료까지 받고 왔는데 갑자기 치통이 시작됐다. 아무리 진통제를 먹어도 고통은 가시질 않았다. 더 곤혹스러운 건 잠 못 이룰 정도로 아픈 치통이 아니라 병원비였다. 미국의 악명 높은 병원비 실상을 익히 들었기에 얼마 안 남은 생활비로 감당이 될 지부터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반벙어리 신세니 의사가 무슨 말을 해주어도 혼자서 알아 들을 자신도 없었다. 일주일을 넘게 버텨도 차도는 없고 얼굴은 보름달처럼 부어 갔다. 목구멍도 부었는지 물조차 마실 수가 없었다. 결국은 하숙집 주인의 권유대로 한인타운의 치과를 찾아갔다. 교포 의사는 어떻게 이렇게 미련하게 참아 왔냐며 사랑니 난 곳이 너무 부어서 당장은 발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소염제와 진통제를 처방해주며 3일 후에 수술 날짜를 잡아 주었다. 소문 대로 십여 분의 진찰은 200불 청구서가 되어 날라 왔다. 병원을 나서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치과 의사가 원망스러웠다. 혹시나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한국 의사한테 제발 다 뽑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동네 친절한 의사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바르게 잘 자라니 굳이 뽑을 필요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 시켰었다. 그의 비범한 친절과 정직성이 원수로 느껴졌다. 내가 평생을 꿈꿔 온 뉴욕 생활이 시작도 못해 보고 사랑니 따위에 끝나버릴 참이었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치자 불안한 마음이 나를 짖눌렀다. 그제서야 단돈 200만원으로 아무런 계획없이 무작정 미국을 찾아 온 나의 꿈이 얼마나 무모한지도 깨달았다. 게다가 나의 꿈이 아무리 원대하고 절대 굽히지 않겠다고 각오해도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작은 도움도 요청 할 수 없는 먼 나라의 이방인 일 뿐이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마음은 초조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루는 하교 길에 무능력함과 소외감에 빠져 길 모퉁이에 주저 앉았다. 화려한 고층 건물로 꽉 들어찬 맨하탄의 풍경이 나를 압도했다. 높기만 한 빌딩의 끝을 보기 위해 목을 꺽어도 하늘은 온통 가려져 한 바닥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내 주제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건 청춘의 꿈이 아니라 허영심이라는 생각이 들자 모든 원망은 내 자신에게로 향했다. 한참을 무기력하게 앉아 쉴 새 없이 내 앞을 지나가는 뉴요커들을 바라 봤다. 다들 어쩌면 그렇게 멋지게 차려 입고 자신감에 차 있는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 보였다. 

‘다음 주에 또 월세를 내면 3주는 버틸 수 있을까?’ 

‘아차 내가 편도로 왔지 …. 돌아갈 비행기 값도 없네 …..’ 

다시 한번 나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무모함이 얼마나 위험한지 느껴졌다. 최소 국제 미아 아니면 국제 노숙자가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자 일어설 힘도 없었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성공하지 않으면 절대로 한국에 돌아 오지 않겠다고 부모님께 호언장담한 나의 모습도 떠올랐다. 성공은 커녕 나는 그저 망상에 빠진 국제 바보였다. 

부정적 생각은 치명적 독 같아서 한 번 빠지면 나오기가 힘들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루 수업 일정을 끝낸 줄리아 선생님이 나를 발견했다.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온 그녀는 어학원에서 나 같은 외국인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자신의 학업을 공부하기 위해 늘 바빴다. 여자 혼자서 전 세계를 다니며 자신의 꿈을 쫓는 모습이 나에게는 마치 여전사처럼 보였다. 

“여기서 모해? 친구 기다리니? 

“아니, 그냥 …..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무슨 뜻이야? 무슨 문제 있어?”

“그냥 …. 난 혼자고 너무 외롭고 어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몰라 모르겠어.”

그녀의 친절한 관심에 나는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서투른 영어로 나의 심정을 설명하기엔 불가능했고 친하지 않은 타인에게 갑자기 나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부끄러웠다.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넌 뉴욕에 있어. 여긴 대부분 혼자 살아. 다들 너무 바빠. 다 혼자서 해결 해야해. 너도 어른이잖아. 어른은 원래 다 혼자 하는 거 아니야? 너가 만약 혼자 사는 거에 익숙하지 않다면, 단순히 여기에서 친구를 사귀고 싶은 거라면 빨리 돌아가”

쏜살같이 쏟아지는 힐난에 좌절감은 민망함으로 바뀌었다.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유학생 생활을 직접 해보고 나 같은 외국인 유학생을 수없이 본 그녀는 냉정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최선은 다해.”

무심히 돌아서는 그녀가 남기는 무뚝뚝한 격려였다. 나도 발걸음을 옮기며 선생님의 조언을 되새겼다. 너무 매몰차서 인정머리 하나 안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서운함까지 생겼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녀의 짧은 조언은 내 생각을 깨우기 시작했다. 낯선 세상에 나만 혼자라는 고립감에 무기력 했는데 모두 다 그렇게 산다는 말이 위로도 되었다. 수렁에 빠진 마음에 빛이 들자 내 특유의 대책 없는 무모함도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걷는 길목마다 고층 빌딩이 빼곡한데 나 하나 어디 비빌 데 없어?'

‘될 때까지 하면 실패가 아닌 거잖아?’ 

억지 논리를 만들어 내니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에 안 들리던 영어도 2달이 되어 가자 무심히 듣던 귀동냥도 효과를 발휘했다. 월반을 하여 반 친구들이 바뀌었는데 어여쁜 한국인 언니가 들어 왔다. 영어를 빨리 배워야 현지 적응도 빨리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일부러 한국인이 적은 학교를 골랐던 터였다. 아직 20살때의 나는 수줍음이 많아 서먹하게 인사만 하고 지냈다. 일주일이 지나자 집에 가는 나를 언니가 불러 세웠다.  

“넌 여기 어떻게 왔어?” 

“아는 친구가 추천해 줘서요”

“너는 여기에 공부하러 온 거야?” 

“아니요….”

“너희 집 잘 살아”

“아니요….” 

“그럼 알바는 구했어?” 

“아니요….”

무례할 수도 있는 선우 언니의 갑작스런 호구 조사에 당황하면서도 내 처지가 절박하니 순순히 대답이 나왔다. 자존심 때문에 가족에게도 말하기 민망한 상황을 염치 없이 구구절절 언니에게 털어 놓았다. 다 듣고 난 언니는 자신의 친 언니가 개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고급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한다며 덥석 내 손목을 잡았다. 원래는 본인이 지원하고 싶었지만 아직 나보다 영어실력이 낮아서 불가능하다며 나에게 기꺼이 양보한다고 하였다. 심지어 당장 자리 났을 떄 꿰차야 한다며 길을 이끌었다. 북적거리고 늘 소란스런 다운타운을 벗어나 식당이 위치한 어퍼 웨스트 사이드 (Upper Westside)에 도착했다. 유럽풍 고급 아파트가 들어 찬 거리는 나의 쪽방이 있는 퀸즈의 풍경과는 너무나 달랐다. 

“잘 할 수 있지? 무조건 다 할 수 있다고 해” 

“네….”

우물쭈물해 하는 나를 식당 입구에 밀어 넣으며 언니는 환하게 손짓했다.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가 아닌 나도 언니의 응원에 용기가 생겼다. 저녁 식사 시간 전이라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한 동양인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일을 하고 싶다고 하자 짤막한 중국인이 나오며 자신이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무덤덤한 얼굴로 간단한 이력 질문을 했다. 식당에서 일해 본 적은 있는지 미국의 식사 문화는 잘 알고 있는지 물었다. 가정환경이 넉넉하지 못해서 우리 가족은 외식도 해 본적이 별로 없었고 내가 알고 있는 외국 음식은 짜장면하고 피자가 전부였다. 고급스런 식당 분위기에 눌려 나는 허황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너무 뻔한 거짓말은 나에 대한 신용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은 모욕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나는 가슴을 졸이며 고급 식당은 아니지만 한식당에서 일해 봤다고 둘러댔다. 사장은 퉁명스럽게 오늘부터 출근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경험이 없는 것 같으니 하루 일을 해보고 결정하자고 제안 했다. 나는 언니가 시킨대로 무조건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장은 갈아 입을 검정색 앞치마와 유니폼을 주며 직원 하나를 불렀다. 사장은 단발머리 동양인에게 내가 해야할 일을 알려 주라며 자리를 떴다.  

일본인 유학생 제니는 나를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주방, 바, 화장실 등 식당의 내부 구조와 메뉴를 설명했다. 깡마른 그녀는 목소리가 크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한국에서 왔다고? 미국은 다 달라. 식당 종업원이라고 웨이트리스를 아무나 시키지 않아. 

이렇게 나처럼 하얀 옷 입은 사람이 웨이트리스고 너는 우리를 돕는 버스보이야. (bus-boy), 

그냥 우리가 시키는 대로 가져다 달라는 것만 가져다 주고 치우라는 거 치우기만 하면 돼. 어차피 실수할 게 뻔하니까 손님이랑 절대 이야기 하지 마.” 

"접시 나를 줄은 알지? 이렇게 손목과 팔의 평평한 곳에 얹으면 돼. 못하겠으면 안해도 돼. 접시 깨는 거 사장이 제일 싫어해." 

그녀의 불친절한 설명과 주의 사항은 빠르게 이어졌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하라는 지시내용 보다 하지 말라는 경고가 더 많았다. 

“손님이 식사를 끝내면 계산을 하고 테이블에 팁을 남기는 데 그건 우리꺼야. 절대로 건드리지마”


그제서야 그녀가 왜 예민하게 굴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뉴욕 대부분의 식당들은 기본급을 주지 않고 팁으로만 지불하는 경우가 많다. 팁은 통례상 계산서 금액의 10~20%로 계산을 한다. 의무는 아니기에 팁을 지불하지 않는 손님은 종업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후한 팁을 지불하는 손님은 그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는다. 서비스의 품질이 좋아야 손님은 기꺼이 팁을 지불하고 유능한 웨이트리스들은 손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좋은 웨이터/웨이트리스로 인정을 받으려면 고급 메뉴와 술을 정중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권하는 판매 기술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계산 금액이 높고 그에 따른 팁의 금액도 높아진다. 이렇게 다년간 경력을 쌓은 프로 웨이터들은 관상쟁이가 된다. 손님이 들어오면 메뉴를 건네며 묻는 간단한 인사와 기본적인 취향 질문이 이어지는 3분의 시간 동안 신통을 발휘한다. 그리고 판매할 수 있는 아이템과 금액을 예상하여 매출을 올린다. 더 나아가 욕심 많은 사장들은 웨이터, 웨이트리스들이 맡은 테이블의 판매 금액과 팁을 정산하여 실적 공개를 하고 그들의 경쟁을 부추긴다. 웨이터들의 자격 요건은 이런 판매 기술만 필요한 게 아니다. 주문이 밀려 음식 나오는 시간이 지체되면 그들은 화려한 말빨과 순발력으로 손님의 말동무까지 되어 주며 손님을 지루하지 않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고급 식당들은 만능 엔터테이너의 기질까지 갖춘 전문 웨이터 웨이트리스를 보조하는 Bus-boy가 필요한 거였다. 요약하면 뉴욕의 식당들은 음식만 파는 곳이 아닌 분위기와 서비스를 파는 복합 매장이었고 식당의 종업원들이라고 한국 같이 음식만 날라다 주는 전달자가 아닌 전문 세일즈맨들이었다. 이 복잡한 산업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다. 나의 절박한 상황을 생각하면 하루에 단돈 50불만 벌 수 있어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레스토랑의 사인이 ‘OPEN’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들어 찼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잡아야 하기에 쉴새 없이 돌아 다니며 접시를 날랐다. 퓨전 스시집이라 음식의 양은 아이 주먹 만큼 작았다. 코스 요리를 시키면 기본 한 사람당 3~5 접시를 먹는데 한 요리가 끝날 때마다 새 접시로 바꿔주어야 했다. 인생 대부분의 식사를 찌개에 쌀밥만 말아 먹어 왔던 나는 그런 호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식으로 수묵화 그려? 도화지도 아니고 접시에 여백의 미를 담나? 

이거 다 닦아 내려면 물낭비 자원낭비네. 그냥 먹으면 안되나?“ 

쉴 새 없이 나오는 빈 접시를 나르며 발바닥은 가시밭을 걷는 것처럼 아팠고 다리는 무겁기만 했다. 식당이 얼마나 바쁜지 7시간이 정신 없이 지나갔다. 영업이 끝나자 사장이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의 한마디에 나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지켜 보니 너는 이쪽에 경험이 전혀 없네. 너는 웨이트레스가 되는 건 전혀 가망이 없겠어.” 

그의 단도직입적 결론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맞아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 그래도 시켜 주시면 더 노력할께요.”

“아니야 아니야 너는 못해” 

그는 아주 단호하게 나의 말을 잘랐다. 너무 황망하여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루만에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도 창피하고 암담했다. 

“그런데, 웨이트리스 대신 호스테스(hostess)를 해 볼래?” 

나의 깜깜한 세상에 갑자기 빛이 들었다. 

“호스테스가 먼 지 아니?“ 

오늘 bus-boy라는 단어도 처음 들었는데 호스테스라는 말을 알 리가 없었다.

”호스테스는 좀더 일찍 출근해서 예약 전화를 받고 테이블 배정을 해주는 거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너가 아직 영어가 부족해서 메뉴를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지켜보니 간단한 예약 전화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때? 할 수 있겠어?“ 

나는 그 빛 한줄기를 꼭 붙잡아야 했기에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의 뜻밖의 제안은 땅딸막한 키에 통통한 볼을 가진 욕심이 가득해 보였던 그가 갑자기 천사로 보이게 했다. 지금 돌아 보면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절박하고 비굴한 때였던 것 같다. 물에 빠졌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사람은 지능이 낮아서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중국인 사장이 경험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나에게 선 뜻 기회를 주어서 나의 뉴욕 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지명 해야만 영어를 쓸 기회가 생기지만 식당에서는 모두 외국인이고 영어로만 소통이 가능하다보니 영어 실력이 빨리 늘었다. 예약 전화는 쉴새 없이 울리고 이것 저것 요구사항이 많은 손님과 웨이트리스 사이에서 영어 사전을 찾아 가며 답을 할 시간도 없다. 실수가 많더라도 체면치레를 할 여유 없이 맨땅에 헤딩하며 배운 영어는 3달만에 어학연수 반년의 학습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한국식 토종 발음에 떠듬 떠듬 간신히 이해하고 말하는 나를 무안 주는 사람은 없었다. 20년 전 뉴욕에 사는 동양인은 대부분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이었다. 마주칠 수 있는 한국인이 드물어서 오히려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혈혈단신 혼자 와서 도전을 해보겠다는 나를 격려해 주는 손님도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본능은 출신 배경이 다를 수록, 피부 색깔이 다를수록 이질감을 느껴서 쉽게 외국인을 배척한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한다는 위협을 느껴 대부분의 인간은 외국인에게 더 쉽게 악의적인 괄시나 텃세를 부리기 쉽다. 생면부지의 외국인에게 선입견 없이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 준 뉴요커(New Yorker)들에게 감사하다. 그들은 나에게 국적, 나이, 인종을 초월하여 세계인과 더불어 사는, 세계 시민이 되는 방법과 삶을 보여주었다. 뉴요커 특유의 쿨한 친화력은 나의 내성적 성향을 탈바꿈 시켰고 다문화에 대한 수용력은 내가 겁 없이 해외를 떠돌수 있는 역마살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내가 진취적이고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 최고의 인생 선생님들이다.     


미국인들에게도 뉴욕은 꿈의 도시다. 각자의 꿈과 야망을 갖고 세계 최고의 도시로 모인 그들은 화려한 학력의 엘리트부터 나처럼 바닥 생활을 하며 나름의 기회를 찾는 사람까지 그 사연도 배경도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은 그 다양한 사람들의 꿈은 하나, 백만장자, 밀리언에어가 되겠다는 것은 모두 같았다. 전 세계 각지에서 모인 그들의 목적과 꿈이 돈과 성공이라는 아니 곧 돈이 성공이라는 명확하고 투명한 야망이 뉴욕의 원동력이다. 내가 도착한 오즈의 도시는 그 투명한 야망들로 반짝이는 유리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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