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가장 대표하는 상징물을 꼽으라면 자유의 여신상과 월 스트리트가 뽑힌다. 이렇게 자유와 자본이라는 현대 문명의 가장 기본이자 큰 축을 상징으로하고 있는 곳도 바로 뉴욕이다. 태초 이례 인류는 물물교환을 시작으로 경제 활동을 하며 봉건주의, 산업주의, 공산주의, 중상주의, 자본주의, 기타등등를 개발해 왔지만 어느 시대든 결국 ‘돈’이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부’는 땅에서 생산 되었기에 그 땅을 지킬 기사나 군대가 필요했다. 하지만 주식과 자본만으로도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기적의 논리는 자본주의를 탄생시켰고 전 세계의 자본이 모이는 월 스트리트는 자본주의의 천명 아래 가장 화려한 황금도시이자 금융 요새가 되었다. 그리고 월 스트리트를 지키는 금융인, 뱅커(banker)들은 자본주의의 수호자이자 전사들이다.
새로운 시대의 전사들은 무거운 중무갑으로 무장하여 전장을 찾아 다닐 수고가 필요없다. 그들의 전쟁은 전 세계에서 국경 없이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그들의 자질은 총칼 수련이 아니라 빠른 정보 수집 능력과 데이터 해석 능력으로 판가름 난다. 승리자에게는 전리품으로 황금보다 휴대가 편리한 억대의 연봉이 주어지며 자본가들의 총애를 받는다. 반대로 금융전쟁에서 패배한 금융가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빚더미에 묻히게 된다.
하지만 누가 패배자의 슬픔을 들으려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빛나는 기사의 무용담에 현혹된다. 그들의 업적은 목을 벤 적의 숫자가 아니라 복잡한 금융공학으로 계산 된 수익률로 기록되고 그들의 상하계급은 운용금의 액수에 따라 결정된다. 각 경제전문 매체나 언론사들은 음유시인을 자처한다. 리포터들은 희망찬 표정으로 전설적 전승자들을 매일같이 주시하며 그들의 전략을 분석하고 칭송한다. 그들의 현실 세계는 상상 이상으로 더 복잡하고 세련되지만 금융 상식 문외한인 나에게는 딱 그렇게만 보인다. 세계 최고의 엘리트라는 그들의 자부심은 호전성으로 보였고 모든 정보를 손익으로만 계산하는 그들의 본능을 나는 적의로 느꼈다. 아마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나의 자격지심이었을 수도 있다.
금융인이라는 타이틀들도 그저 한 직업의 일종일 뿐이지만 뉴욕에서는 그 지위가 다르다. 160만의 맨하탄 인구중에 40만 이상이 금융업에 종사하는데 비율로 따지면 약 30%로 다른 일반 도시 보다 훨씬 높다. 그리고 상위1%인 그들을 위한 요식업, 서비스업등을 고려하면 뉴욕 산업 구조의 절반 이상은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맨하탄은 뱅커에 의해, 뱅커들을 위한 뱅커의 시스템으로 도시가 움직인다. 보통 회사원들의 출근 시간은 오전 8시나 9시이지만 새벽 4, 5시부터 일어나는 애널리스트들과 금융맨들을 위해 월스트리트 주변은 더 일찍 붐빈다. 게다가 커피 트럭이나 도넛 가게들부터 신문을 파는 가판대까지 전화 한통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배달 된다.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전장터에서 싸우는 그들을 위해 모든 시스템이 그들의 편의를 위해 운영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 배달의 민족이나 우버 이츠(Uber Eats)등이 생겨서 배달 서비스가 일반화 되었지만 25년 전 미국의 대부분 주에서는 배달 가능한 음식이 도미노 피자 같은 피자집 정도인 걸 생각하면 뉴욕은 모든 산업 트렌드에서도 얼마나 최첨단을 달린 것이다.
바쁜 뉴요커들은 요리를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요리를 할 시간도 없고 요리하기엔 너무 맛있고 다양한 전 세계 식당들이 집안으로 배달이 된다. 편안하게 집 안에서도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 음식부터 러시아,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음식까지 전 세계의 진미를 맛 볼 수 있다. 맨하탄의 면적은 강남구보다 2배 정도 적지만 공식적으로 등록된 식당만 26,000개이다. 그 수는 한 사람이 맨하탄에서 태어나 매일 다른 식당을 방문해도 평생 다 못 가볼 숫자라고 한다. (서울시 면적 605km2로 맨하탄보다 8배 이상 크지만 등록된 식당 수는 85,000개로 맨하탄의 식당 비율이 면적 크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그래서 아무리 크고 으리으리한 고급 아파트라고 해도 부엌이 차지하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아주 작다. 배달 음식 데워 먹기용 부엌이기에 대부분 뉴요커들의 부엌은 거의 새것처럼 깨끗하다. 서랍 안에는 애호하는 음식점 배달 메뉴가 가득하고 냉장고에는 주요 음식점 번호와 긴급 연락처가 붙어 있다. 그리고 간혹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는 번호가 있다면 대부분은 불법 향정신성 화학약품 즉, 마약이나 대마초 배달 번호다. ‘돈이면 무엇이 다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이루어 지는 건 합법적인 일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불법 제품도 쉽게 전화 한통이면 배달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런 불법적인 일이 이제 한국에서도 온라인으로 주문하여 택배로 주문 받는다고 하니 새삼 놀랄 일이 아니긴 하지만 뉴욕은 이미 오래전에 상용화했다.
이태리 명품 정장을 말쑥하게 빼 입고 고급식당에 앉아 최고급 와인을 시키고 우아하게 플래티늄 카드를 꺼내는 그들을 보면 나같은 외국인 유학생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벌어지는 금융전쟁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대형 은행일수록 경쟁이 치열해서 40의 나이가 되면 은퇴를 하거나 작은 규모의 투자은행으로 창업을 한다. 엘리트 코스만 밟으며 하루 18시간의 고된 업무 강도를 버텨 왔지만 천문학적인 돈을 만지는 최고의 승부사, 전사의 삶은 평균 직장인의 삶보다 짧다. 그리고 승부욕이 뛰어난 그들은 화려한 삶만큼 비례하는 영화 주인공의 비극처럼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약에 손을 댄다. 그들의 이런 실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월스트리트의 늑대들“(The wolf of Wallstreet)에 잘 표현되어 있다. 또는 뉴요커의 필수 소식지 더 뉴요커 (The New Yorker)나 뉴욕 신문(The New York Times)에 종종 자살이나 마약중독이 원인이 된 불명예스런 전사자들의 소식이 실린다.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아무리 단속을 해도 마약이 대중화 되었고 대마초는 불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길에서 대마초를 피거나 파는 사람을 용기를 내어 경찰에 신고해도 경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외면한다. 미국에서는 앞의 글에서 내가 경험한 것처럼 파티가 무르익게 되면 대마초를 나누어 피는 게 일상이다. 유학생이나 해외 생활을 하게 되면 이런 유혹은 늘 마주치며 그 검은늪에 빠져 인생을 망치는 사람을 숱하고 보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환락과 환영의 세상에 끼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했다. 자신의 인생 하나뿐 아니라 가까운 친구와 가족까지 망가지는 모습은 너무 무책임하다고도 생각했다. 아직 내가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최소한 살면서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소신도 생겼다. 그리고 어리숙해도 적어도 환영이나 환락에 취한 기쁨이 행복일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하루에 주어진 24시간 동안 만들 수 있는 행복이 고작 2g의 인위적 약에 의한 것이라면 그가 가진것이 프래티늄 카드라 해도 부럽지 않았다. 다행히 그 최소한의 분별력은 뉴욕 이후의 해외 유랑 생활에서도 나를 지켜 주는 최선책이 되었다.
전쟁의 영웅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아야 전설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맛본 자본 환락의 끝은 아름답지 못하다. 최근에도 한 영국 신문에 어떤 젊고 유능한 금융인이 자신의 고층 아파트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파티를 열고 술을 마시다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뛰어 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주변인들의 추측성 인터뷰도 같이 실렸지만 아무도 그의 불행을 예견하진 못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은 자본주의 최전선에 선 최고의 전사들로 황금 만능주의, 금권주의를 이끌었지만 어쩌면 자본 이데올로기의 소모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