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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연 Mar 06. 2022

마법에 걸린 공주들

궁핍한 유학생 생활은 늘 불안의 연속이었다. 빠듯하게 생활비를 모아 월세를 내고 남은 생활비를 다시 모아서 학비를 내면 빈털터리가 된다. 하지만 뉴욕의 생활은 모든 고생을 당해도 즐겁기만 했다. 새로이 만나게 되는 다른 국적 친구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들으면 마치 전세계로 모험을 다니는 기분이었다. 주변에 친구가 생기기 시작하고 뉴욕에 적응이 되어 나는 한국인 하숙집을 정리 했다. 내가 일하는 식당은 자정 12시에 문을 닫는데 집에 오면 새벽 1시가 넘어서 본의 아니게 주인집 식구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었다.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에 행동이 더 조심스러웠는데 어느 날은 한국 친구에게서 하숙집 전화로 연락이 왔다.


”너 동거 한다며?“ 


대뜸 비난처럼 들리는 질문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지금이야 한국도 동거가 많이 자유화되었지만 당시엔 동거라는 것은 부모님에게 머리채 잡히는 최대의 불효이자 불문율이었다. 게다가 난 아직 뉴욕이라는 멋진 데이트 상대에 빠졌지만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일같이 식당에서 일을 하는 미천한 유학생 신분이었기에 누군가를 만날 여유도 의향도 전혀 없었다. 억울한 누명을 당한 내가 화를 내며 추궁하자 친구는 거리낌 없이 제보자의 신분과 정황을 누설했다. 내가 매일같이 밤 늦게 귀가를 하고 식당 주인이나 친구들이 하숙집으로 전화를 한다는 사실은 여러명의 입을 거치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도착하자 신원 미상의 동거남 이야기로 발전한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 집에 더 있는 것도 불편했고 앞으로 또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나돌지 몰라서 짐을 쌌다. 


소원하던 맨하탄에서 살고 싶어서 여기 저기 수소문을 한 결과 아는 언니의 언니가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사는데 마침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했다. 바로 할렘 밑 동네라 안전하며 저렴했고 내가 일하는 곳과 센트럴 파크랑도 가까워서 드디어 맨하탄 입성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룸메이트는 2명의 한국인 언니였는데 린다 언니는 회계사 자격증을 따서 대형 회계법인에 근무중이었고 레이첼 언니가 집주인인데 네일 가게에서 매니저로 일하며 그 집을 장만한 것이었다. 뉴욕에 온지 십여년이 넘은 언니들은 성격도 너무 다르고 취향도 달랐다. 린다 언니는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털털한 성격으로 전형적인 회계사들과는 달리 까탈스럽지도 않고 계산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레이첼 언니는 결벽증도 심하고 완벽주의 성격에 늘 잔소리가 많았다. 그런 극성이 있기에 집도 빨리 장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중 막내인 나는 덤벙거리고 실수가 많아 핀잔을 듣는 일이 많았다. 간혹 레이첼 언니한테 호되게 한 소리를 들을 땐 너그러운 린다 언니가 내 편을 들어 주거나 따로 불러 내어 위로를 해주었다. 지금에 돌아 보니 오히려 타국의 설움을 한국인한테서 받은 적이 더 많다. 

두 언니는 영어도 나보다 유창하게 잘하고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바깥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가끔 가족을 만나거나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사고관도 훨씬 보수적이라 미국에 살면서도 외국인 친구도 없고 외국인 남자 친구 만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둘 다 싱글이 된지 오래라 연애를 하고 싶은 열망은 가득한데 적극적인 실천 의지는 전혀 없었다. 외롭다고 매일 투정을 부리면서도 저녁엔 TV 앞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녀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한국 드라마를 보는 거였다. 


한번에 20부작 50부작씩하는 드라마를 VHS라는 책 크기만한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서 보는 수고로움을 지금의 세대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 한국에서 방영이 된 영상분을 테이프에 불법 복사해서 대여하는 방식이라 한국보다 유행 시간도 훨씬 느렸다. 외로운 타향살이에 한국 드라마는 미국 교포의 향수병을 달래 주는 특효약이었다. 한국 교포들이 주로 모여 사는 동네에는 꼭 한인마트가 있었고 그 안에는 한국 비디오 창구가 있었다. 테이프 대여료는 개당 1~3달러인데 인기가 너무 많으면 대기자 명단이 꽉 찬다. 최신 인기작은 발빠른 향수병 환자들의 병문안 공연을 먼저 마치고 뉴욕 시내를 돌고 돌아야 하기에 차례를 기다리는 데까지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나는 영어를 능숙하게 하고 대학에 진학 해야한다는 욕심에 드라마를 일일이 챙겨 보지 않았다. 전에 살던 하숙집에는 내 방에 TV도 없었기에 현지 뉴스 조차 접할 수가 없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들은 ”호텔리어“를 보며 배용준과 사랑에 빠져 버렸다. 둘이 나란히 앉아 배용준이 무슨 말만 하면 

”어머, 어머“

”어어머어어~~멋있다아아~~“

를 남발하며 상사병에 빠졌다. 언니들은 배용준의 외모 감상회가 끝나면 테이프를 꺼내며 한숨 섞인 푸념을 했다.

”저런 남자를 어디서 만나지?“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은 멋진 언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환상에 빠진 언니들을 보자 나의 환상이 깨져 버렸다.   

‘있어야 만나죠 있어야 ..... 아니 저렇게 잘 생기고 능력까지 완벽한 엄친아가 있겠냐고요? 그리고 그렇게 잘 났는데 미쳤다고 그런 남자가 아직도 싱글이겠냐고요?’

나는 그녀들이 내심 너무 한심했지만 감히 눈물까지 글썽이며 배용준의 마력에 빠진 그녀들을 구해낼 용기가 없었다. 또한 미국에 살면서 한국의 뻔한 허구 로맨스 드라마를 보며 시간 낭비를 하는 언니들이 나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나의 허영심과 상상력은 연애관에서는 작동을 하지 않았다. 남자 문제에서만큼은 냉철한 이성과 논리를 발휘하는 나의 현실 감각은 혼자 살아야 한다는 나의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KBS, MBC, SBS 방송사가 다르고 드라마 제목이 다양해도 내용은 대충 비슷비슷했다. 여주인공은 집안이 가난하지만 착실하고 긍정적인 성격인데 무뚝뚝하지만 잘생기고 능력있고 자상한 남주인공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세상 냉정하지만 내게만 자상한 그 남자에겐 치명적인 신분의 비밀이 있는데 그가 바로 재벌 2세이기 때문이다. 두 남녀 주인공은 뻔한 우여곡절 레파토리를 남발하며 알콩달콩한 사랑을 하지만 사악한 빌런, 시어머니의 등장으로 잠시 이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에 진심인 그들은 악당을 설득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그렇게 매해 마다 재탕되는 사골국은 애저녁에 나의 모든 관심을 잃었다. 그리고 드라마에 빠져 남주인공과 비슷한 사람을 현실에서 찾는 친구나 언니들을 보면 뉴욕에서 황금을 찾겠다는 나의 꿈이 더 양심있고 실현 가능해 보였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이든 명예든 부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고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그리고 완벽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선 나도 그 완벽 언저리에 있어야 서류전형이라도 넣어볼 수 있다. 


언니들의 눈과 마음을 훔친 배용준은 한동안 언니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완벽한 왕자님이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곧 끝이 났고 언니들은 부작용을 앓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무료한 삶에 대리만족을 주던 신데렐라 이야기가 끝이 나버리자 마법도 깨지고 왕자님은 다른 여자랑 사라졌다. 늘 아름다운 브라운관 속이 아닌 현실 세상 밖으로 무참히 버려진 그녀들은 허무함과 좌절감에 이젠 TV 앞이 아니라 방바닥에 붙어 버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마약보다 위험한게 한심한 로맨스 드라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서 ‘최소 성공은 못 하더라도 환상속에서 길을 잃지는 말아야겠다’고 내게 굳게 다짐했다. 게다가 황금이던 사랑이던 모험 없이 누군가에게 이미 만들어진 진부한 이야기라면 끔직하게 지루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녀들이 내가 뉴욕을 떠난 후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의 왕자님을 찾았단 소식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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