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한국은 자랑스럽지만 부끄러운 부분도 많은 나라다. 나의 조국은 분명 전 세계 어디에도 이루지 못한 경제번영을 반 세기라는 짧은 시간 내에 이루었지만 ‘뼈아픈 성장통도 많이 겪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학창 시절에 뉴스에서 본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지만 살면서 ‘그럴 수도 있구나...’라는 안전 불감증도 심어 주었다.
맨하탄 입성 이후 센트럴 파크 출입이 잦아지며 나는 진정한 뉴요커가 된 듯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 진학 준비도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영어 원서를 술술 읽고 발표할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하지만 학비 문제가 제일 큰 부담이 되었다. 식당의 벌이가 좋아서 아직까지는 집에 손을 벌리지 않았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수업을 준비하며 나는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마침 린다 언니도 휴가를 냈다며 오랜만에 신이 나 있었다. 언니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지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300알이 든 애드빌(Advil) 한통을 사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동이 났다. 아파트에서 제일 큰 방을 임대 한 언니는 TV도 제일 크고 신형이었다. 그래서 호텔리어도 꼭 린다 언니 방에서 같이 보아 왔다. 문명인 흉내라도 내고 싶어서 아침의 시작을 뉴스로 시작했다. 그런데 화면에는 회색 연기가 나오는 빌딩이 차지하고 있었다. 뉴스 앵커는 영문은 모르겠지만 테러 같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직도 영어 듣기가 안되나 싶어 영문을 물었더니 린다 언니가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테러인가봐. 전에도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폭탄 테러 났었거든.
괜찮아 괜찮아, 쟤네 저거 다 고쳐서 쓴다.“
늘상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뉴욕이라 이 정도의 테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언니가 날 안심 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폭발 하더니 빌딩 화면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바로 여느날처럼 평화로운 아침을 시작하는 사이 911 테러가 시작 됐다. 언니랑 나도 갑작스런 상황에 정지한 듯 TV만 주시했다. TV 속 화면은 엉뚱한 곳을 비추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앵커의 당황한 목소리만 들렸다. 그는 놀란 목소리를 심하게 더듬으며 무언가가 폭발했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후 다시 방송 하겠다고 했다. 뒷 배경으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어머, 세상에 ... Oh my god...“ 갑자기 린다 언니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모래요?“
”앵커도 모른데 ... 큰 일 났나봐.“
그 당시엔 그랬다. 아무도 어떻게 된건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언니랑 나는 아예 TV 앞에 앉아서 채널을 돌려 가며 봐도 모두들 모른다고만 했다. 한 참 후에야 한 엥커가 비행기가 충돌하여 폭발이 일어 났는데 사고인지 테러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지나서야 첫 번째 연기도 비행기가 충돌해서 난 사고이며 명백한 테러라고 했다. 아무리 테러라고 해도 비행기가 빌딩과 일부러 충돌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의 모든 정황을 알게 된 리포터는 울먹이며 미국이 공격을 당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안타깝지만 일도 해야하고 학교도 가야 하니 주섬 주섬 가방을 챙겼다.
”야, 너 어디가?“
”학교 가야죠.“
”가긴 어딜가? 지금 비상사태인데 ... 다 문 닫았을 걸?“
”에이 설마요 .... 건물 하나만 불타는 건데 ... 별 일 없겠죠.“
했는데 순간 TV속에서 불타던 월드 트레이더가 갑자기 거대한 회색 연기 속으로 주저 앉았다. TV에서 나오는 비명은 더 커지고 린다 언니의 비명 소리도 났다. 언니는 사색이 된 얼굴로 문을 나서려는 나를 말렸다.
”걱정 마세요 언니, 한국은 다리 무너지고 건물 무너져도 다들 등교도 하고 출근도 해요.“
”야 여긴 미국이야, 한국 같지 않아.“
”가서 문 닫으면 다시 오면 되죠 뭐.“
나는 설마 별일 있을까 싶어 자신있게 길을 나섰다. 그런데 당장 빌딩 모퉁이에 있는 지하철역부터 봉쇄되어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폴리스 라인(Police Line) 테이프가 입구 마다 쳐져 있었다. 학교는 미드 타운이라 집에서 걸어도 40분 밖에 걸리지 않아서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늘 시끄럽고 도로를 꽉 메우던 자동차와 뉴욕의 명물 옐로우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버스는 운행을 할까 싶어 정류장을 확인 했다. 버스는 모두 텅 빈 도로를 텅 빈 채 무서운 속도로 다운타운을 향해 달렸다. 기사 옆에는 멀리서 보아도 긴장한 얼굴의 경찰이 서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분위기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참을 걸어 다운타운이 가까워 질수록 나를 향해 걸어 오는 사람들의 무리도 볼 수 있었다. 길에는 대부분 북쪽으로 올라 오는 사람들이었고 다운타운으로 내려 가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때때로 미련함도 많은 나는 그때까지도 안전 불감성반 호기심반으로 길을 걸었다. 무리를 이룬 모두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회색 재를 뒤짚어 쓰고 있어 얼굴 분간이 되지 않았다. 큰 두 눈동자만 보였지만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대부분 눈물을 흘렸는지 눈물 자국이 깊게 패였다. 정신이 나간 듯 흐느적 거리며 걷는 그들은 딱 좀비처럼 보였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보자 나도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번 나선 길을 그냥 되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코리아 타운이 있는 미드 타운쯤 도착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우르릉 땅을 울리며 탱크들이 나타났고 그 뒤는 군인들이 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는 휴가를 나온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종종 보았지만 미국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큰 탱크도 처음 보는 거였다. 내 옆에 있던 미국인도 자신 평생 탱크는 처음 본다며 ‘oh my god’을 외쳤다. 잠깐, 탱크를 처음 본다니 미국인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같이 늘상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나는 이런 광경을 종종 보았기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무도 나에게 명령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공포심과 비장함 사이에 서 있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끝이 없이 이어지는 군대 행렬을 보며 나도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더는 내가 가서는 안 될 곳 같았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될까봐 더 겁이 났다. 참혹한 그 무엇을 보게 된다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다시 한참을 걸어 아파트에 돌아 왔다. 린다 언니도 헛웃음을 지으며 반겨 주었다. 이 심각한 재앙을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한 911은 이만큼까지이다. 어린 내가 타지에서 감당할 수 있었던 건 딱 그만큼이었다. 일주일간은 전화가 먹통이 되어 걱정이 가득할 부모님께도 연락을 할 수가 없었고 몇 안되는 뉴욕 친구들의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거나 등교한 친구들은 안전상을 이유로 꼬박 하루를 갇혀 있기도 했다. 그 커다란 빌딩은 처참하게 무너진 이후로도 몇 달 며칠을 타올랐다. 멀리서도 무섭게 불타는 화염의 크기가 왠만한 건물처럼 커서 밤에도 다운타운을 환하게 밝혔다. 타는 냄새는 더 멀리 불행처럼 퍼져서 온 도시에 매연 냄새가 가득했다. 한동안 린다 언니는 사무실에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있는 죄로 일주일에도 몇 번씩 비상 대피 훈련을 받았다. 30층 계단을 지시에 따라 차례로 내려 갔다가 올라 와야 하는 훈련에 지쳐 언니는 집에 오자마자 쓰러졌다. 외양간 잃고 소 고치는 바보짓도 다행히 한국만 앓는 고질병이 아니었다. 도시를 휘감은 매쾌한 매연처럼 가슴 아픈 사연과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았다. 나야 유명한 경제인이나 금융인을 모르니 사고로 안타깝게 잃은 사람이 없었지만 한동안 뉴욕에는 길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우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외지인인 나하고는 상관 없는 그저 먼 존재로만 알았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 중국인 친구 피터에게서 문제가 생겼다. 어렸을 때 가족들과 불법 이민을 왔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책임감이 넘치는 피터는 늘 친구들을 챙겼다. 술 한잔에 얼굴이 뻘개면서도 안재욱의 '친구'를 부르기 좋아했다. 피터는 독학하여 주립대를 졸업하고 또래보다 일찍 취업하여 대형 병원에서 총무일을 보고 있었다. 또래 중 유일하게 자가용까지 소유해서 친구들이 부러워했는데 여자 친구들을 일일이 직접 데려다 주며 기사도까지 발휘하는 너무나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다. 얼마전 내가 맨하탄으로 이사할 때도 부탁할 사람 하나 없었는데 소식을 들은 피터가 휴가까지 내며 짐 나르는 것을 도와 주었다. 911이 지난 몇 달 후 차이나타운에 모여 앉은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았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 큰 일을 겪고 나니 서로의 생사가 고맙고 반가웠다. 피터가 일하는 병원도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있는 다운타운에 있었다. 피터는 자랑스레 자신의 무용담을 털어 놓았다. 갑자기 쾅쾅 소리가 나더니 병원 안으로 사람들이 미친 듯이 들어 왔다고 했다. 비행히가 폭발하면서 떨어지는 파편에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팔이 없는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 머리나 등에 커다란 유리 파편이 박혀서 들어 오는 사람 등등 지옥을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갑자기 들이 닥쳐서 자기 같이 의료 지식이 없는 사무실 직원도 도와야 했다고 한다. 자기는 늘 사무실에 앉아서 서류만 들여다 보느라 지루 했는데 마침 자기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서 신이 났다고 했다. 가장 큰 자신의 업적은 어느 환자가 하반신을 모두 잃었는데 그 환자의 몸에 올라 앉아서 있는 힘껏 눌러서 지혈을 해야 했다고 했다. 자기가 의사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있는 힘껏 눌러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상황이 다급해서 무섭거나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수술실까지 무사히 들여 보내고 기진맥진한 피터는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고 한다. 그런데 환자의 피로 온 몸이 피범벅이 된 피터를 보고 놀란 간호사들이 또 다른 중환자로 착각해 그를 침대에 눕히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웃으며 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 환자가 살아서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우리는 모두 맏형같이 든든한 피터를 보며 건배를 했다. 불행 속에서는 그렇게 기적도 있나보다 했다. 단순히 ‘살아 남은게 기적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피터가 그렇게 건강히 잘 지내는 줄 알았다. 그가 우리들 속의 작은 영웅인줄 알았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쉽게 가시질 않는다는 걸 우리는 몰랐다. 그는 안하던 술과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늘 큰 형처럼 허허 웃던 그는 화를 내는 일이 많아졌고 출근도 안 하는 날이 더 많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는 모두에게서 사라졌다. 악마의 연기는 그렇게 너무나 많은 사람을 어둠 속으로 삼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