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가 뉴욕에 남긴 상처는 너무나 컸다. 뉴욕 특유의 흥분과 역동적인 분위기는 모두 사라지고 도시 전체가 장례식장이 된 듯했다. 뉴저지(New Jersey)나 커네티컷(Conneticut)등 다른 주로 이사를 하는 회사나 사람들도 많아 우울한 도시는 유령도시처럼 변했다. 식당이나 바를 찾는 손님들도 줄어 나는 일을 그만둬야 했다. 다른 일자리를 알아 봐도 벌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에 쏠쏠했던 벌이로도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는데 일할 시간을 더 늘리면 학교를 갈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유학생은 휴학도 신청할 수 없고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바로 불법 체류자로 분류 되어 전학이나 새로운 비자 신청이 불가능하다. 당장 다음 학기를 등록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 가거나 불법 이민자로 살아야하는 최악의 선택 밖에 없었다. 작고 당연한 것들이 허용되지 않아 불편한게 이방인의 설움이었다. 불안감은 극도로 차 올랐고 나는 만성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소화제를 아무리 먹어도 체증은 가시질 않았다. 하교 길에 힘 없이 집 근처 약국에 들렸다. 샤리 (인도식 전통 의상)을 입지 않았어도 이마 가운데 보석, 반디를 붙인 약사 아주머니가 나를 맞았다.
”또 소화가 안돼?“
”네. 다른 약을 주세요.“
”이미 말했듯이 다른 약은 처방전이 있어야 해. 내가 줄 수 있는 약은 이것 밖에 없어.“
소화가 안 된다고 다시 진료비에만 200불을 낼 수는 없었다.
”그거라도 주세요.“
”병원에 한번 가보지 그래?“
”.... 괜찮아요. 일주일 정도 더 견뎌 보죠.“
”소화 문제는 다 스트레스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유학생의 전형적 문제에요. 일자리 구하기는 어렵고 학비 감당은 안되고 ...... 포기해야 할까봐요.“ 뉴욕에 2년을 넘게 살다 보니 나도 주절주절 말이 많아졌다. 드세 보이는 아줌마 인상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럼 없이 고민을 털어 놓았다.
”난 늘 학교에서 늘 1등만 하고 약대를 졸업한 다음에 의사 남편하고 결혼했어. 누가 봐도 완벽한 삶이지. 근데 내가 인생에 딱 두 번 실수를 했어. 첫 번 째는 뉴욕에 온 거고 두 번째는 인도로 돌아간 거야. 향수병이 생기고 가족이 보고 싶어서 돌아 갔지만 3달만에 돌아 왔어. 뉴욕 경험을 한 이상 너도 어딜 가도 행복하지 못할 거야.“
약사 아줌마는 카운터까지 탕 치며 장담을 했다. 그녀의 단호함이 저주 같이 들리기도 했다.
”잘 생각해. 뉴욕은 첫 사랑 같은 곳이야. 한 번 만나면 평생 잊지 못해.“
그녀는 진심으로 조언했다. 그러나 뉴욕과의 로맨스는 나만의 철 없는 짝사랑이었을 뿐이었다. 2년 가까이 운 좋게 버텼 왔지만 내가 가고 싶은 학교의 학비와 입학 기준은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 당장 벌이가 시원치 않아 더 싼 곳의 집을 알아 보았다. 맨하탄에서 제일 허름한 원룸 스튜디오에 룸메이트로 들어 갔다. 세간살이는 나의 키만한 검은색 이민 가방 두 개 이기에 반나절이면 이사가 가능했다. 이곳 저곳을 떠돌며 툭하면 이사를 하다 보니 이민 가방 두 개 이상의 물건은 사지 않는 요령이 생겼다.
새로 이사한 스튜디오는 너무 낡아서 나무 창틀은 썪어서 헐렁거리고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다. 안입는 옷가지로 바람을 막아 봤지만 뉴욕의 겨울 추위는 한국보다 혹독해서 유리창 하나로는 방안 전체가 냉장고처럼 추웠다. 외투랑 양말까지 껴 입고 룸메이트랑 이불을 같이 덮어도 매서운 추위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라고 한국보다 모든 것이 첨단이고 고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기본으로 50년 100년 넘은 거물들이 많다 보니 주거 생활 수준은 오히려 한국이 더 높다. 여름에 필수인 에어콘은 창문에 끼워 쓰는 에어콘이라 한국에서 주로 쓰는 스탠드형 에어콘보다 성능이 떨어졌다. 뉴욕의 겨울은 한국보다 기온이 3~5도 더 낮은데도 한국식 온돌이 아니라 작은 라디에이터 하나로 버티기에 늘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근황을 들은 한 친구가 안 쓰는 이동식 라디에이터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무엇이든지 아껴야 하는 나에게는 더 없기 고마운 선물이었다. 생각보다 큰 라디에이터는 무게가 많이 나갔다. 지하철 계단을 낑낑 거리며 오르고 내려야 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생각에 힘이 절로 났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국인 룸메이트 친구에게 자랑스레 선 보이며 전원을 꽂았다. 침대랑 책상 하나에 꽉 차는 코딱지 만한 방이 금방 따뜻해졌다. 둘은 아이처럼 손을 잡고 좋아했다.
”이게 바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인가봐.“
”오늘 밤은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거네.“
”추위 걱정 없이 머리도 감을 수 있겠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을 거창한 희망 사항처럼 나열했다. 그 친구도 나처럼 여유가 없어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처지가 비슷한 친구를 만나니 가난하고 가진게 없다는게 그닥 챙피하지도 않았다.
뉴욕의 가장 큰 명절은 추수 감사절과 크리스마스다. 이 두 기간 동안에는 가족을 찾아 떠나는 뉴요커들 때문에 도시가 텅 빈다. 왠만한 상점과 식당들도 다 문을 닫기에 우리 같은 외지인이 갈 수 있는 곳이나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샤워를 먼저 마친 룸메이트가 기분 좋게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윙’하는 소리가 시원 스럽게 들리더니 갑자기 ‘탁’하며 방 안의 불이 꺼졌다. 전등이며 TV며 금방 힘들게 모셔온 라디에이터의 전원이 모두 불통이 되었다. 오래된 건물의 가장 작은 방에서 갑자기 전력량이 늘어나니 퓨즈가 나간 것이었다. 건물 관리인에게 도움을 청하러 로비로 내려갔다. 뉴욕의 빌딩엔 왠만하면 24시간 상주하는 관리인이 있다. 대부분의 건물이 낡아서 작고 큰 문제가 많기에 관리인이 급한 민원을 해결해 준다.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고 관리실에 도착했지만 관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손글씨로 띠엄 띠엄 쓴 메모가 붙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휴가 중. 긴급전화 917-XXX-XXXX“
어이가 없어서 쓴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이제 악몽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허무하게 방에 돌아 와 룸메이트랑 마주 앉았다. 양초 하나 없고 너무 추운 골방에서 우리는 덜덜 떨며 대책을 고민했다. 둘다 남에게 아쉬운 부탁을 할 수 있는 주변 머리도 없어서 어디 하룻밤 의지하거나 피난 갈 곳도 없었다. 뼛속을 갉아 내는 듯한 추위에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탁탁탁’하며 이가 떨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차라리 밖이 더 따뜻하겠어. 심야 영화하는 극장이라도 가자. 가서 몇 편 보다 보면 그래도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 거야.“
20여년전 뉴욕은 양심사회라서 그런지 나같은 악덕 소비사가 악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영화 상영 스케줄을 짜 맞추는 잔머리와 관리인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모른 척 할 수 있는 뻔뻔함, 그리고 찔리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할 수 있는 장시간의 안내력이 있다면 6불 짜리 입장료로 하루종일 영화 관람이 가능했다. 주머니 얇은 내가 종종 저지르는 범죄였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직원들이 모른척 해주었다. 아파트 빌딩을 나섰으나 맨하탄의 화려한 조명은 모두 꺼져 있었다. 바람이 새는 스튜디오가 얼마나 추웠던지 오히려 건물 밖이 따뜻했다. 길 거리는 너무 한산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캐롤이 들리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오가는 사람들로 뉴욕 거리는 잠깐이나마 테러의 악몽을 잊은 듯 했었다.
둘은 걸어서 집 근처의 영화관으로 향했다. 시간표를 보니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최대한 극장 안에서 몸을 녹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새벽 2시까지였다. 영화관도 텅 비어서 빗자루를 들고 다니며 뒷정리를 하는 2명의 직원과 우리 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갈 곳 없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영화관은 구세주였지만 그런 불쌍한 사람도 우리 둘 뿐이라니 .....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건지 우리가 너무 평균 미달인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우선 몸을 녹이는게 급해서 이미 상영을 시작한 영화의 티켓을 구매했다. 지금은 영화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추위를 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고 영화도 우리의 상황처럼 아주 재미가 없었던 거 같다. 이제야 몸이 좀 녹은 것 같았는데 영화는 곧 끝이 났고 새벽 2시가 되었다. 마음이 심란해진 우리는 그냥 길을 걷기로 했다. 바깥보다 더 추운 냉방에 다시 들어 가고 싶은 마음은 그 친구도 나도 전혀 없었다. 갈 곳 없는 우리는 밤새 걸었고 몸을 꽁꽁 얼리는 겨울 바람에 나의 마음까지 얼어 갔다.
텅빈 맨하탄을 걸으며 뉴욕에 처음 도착 한 호기에 찬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 동안 정신 없이 지내 온 2년의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고 내가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지자 엄마와 집 생각이 났다. 실패했다는 벼 아픈 자각과 자기연민에 빠지자 온 몸이 무겁고 세상이 허무하게 보였다. 불 꺼진 뉴욕의 허름한 현실은 다른 도시와 별다를 바 없었고 딱 나의 모습처럼 보였다. 뉴욕은 그저 나의 허영으로 지어진 환영일 뿐이었다. 나는 약사 아주머니의 조언을 무시하고 짐을 쌌다. 아무리 뜨겁게 사랑해도 차디찬 겨울 왕국을 나의 영원한 인생의 동반자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첫사랑의 실연은 평생 간다는 상투적인 말처럼 나는 지금도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세상을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