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엘리베이터를 못 타는 이유는?”
아들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음... 몰라.” 한다. 의기양양한 목소리의 당신은 “만원이라서!” 대답한다. 모른 척 눈을 감고 있던 나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참고 있던 웃음이 빵! 터진다. 만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의 흐뭇한 얼굴을 떠올리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아들도 재밌었는지 힘차게 물개박수를 친다. 하루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다. 어둠이 내려앉는 밤이 되면 너덜 해진 정신과 육체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세헤라자데’를 조력하는 당신의 센스는 기가 막힌다. 오늘 밤도 아들은 당신에게 넌센스 퀴즈를 내달라고 조르고 있다.
“죽은 소가 많아지면?”
“힌트 없어?” 당신은 입을 꾹 다물고 도리도리 고갯짓을 한다. 아들은 머리를 쥐어짜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음.. 진짜 모르겠어.” “산 소 부족!”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온다. 책상머리가 아닌, 하루 종일 현장에서 일하는 당신은 대체 언제 이런 넌센스 퀴즈를 배워 밤마다 아들에게 들려주는 것일까? “또 내줘~” “하루에 한 개씩~” “히-잉” 모래요정 바람돌이의 선물도 아니고 하루에 한 개씩이라니! 아들은 아쉬움으로 잠자리에서 몸부림을 친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나의 뇌도 당신 덕분에 잠시나마 산소를 채운다.
나의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말이라도 한번 붙일 요량이면 다음에 이어질 대화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수십 번 곱씹고 난 후에야 말로 옮겼다. 나 또한 곰살맞은 성격이 못되어 몇 마디 나눈 대화도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보다 나중에 어떤 타이틀을 가진 어른이 될지 더 궁금해했다. 그러다 보니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어려워했던 것 같다.
당신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갖은 피난살이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삶을 살아내는 것이 삶의 목표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태어났기에 자식들이 부디 순사에게 잡혀가지 않게 “바르게 살아라”를 입에 달고 사셨다고 한다. 시골 마을길이 끝나는 언덕 위 작은 집에 드디어 터를 이루고는 성실을 근본으로 한평생 땅을 일구는 농민이 된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자라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당신도 처음부터 아들과 살가웠던 건 아니었다. 아들은 내가 영화사에 다시 출근하기 시작하고부터 엄마만 찾았다. 당신이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데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엄마만 찾는 아들에게 서운했는데 그런 아들 편만 드는 나에게 하루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날 “나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라고 말하는 당신의 기운 빠진 목소리가 내 귀에 깊이 박혔다.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의 당신에겐 새살맞은 아들이 못내 버거웠으리라. 우리가 함께 있을 때 혼자만 소외되는 기분에 당신만의 동굴로 숨고 싶었을 텐데. 엄마 껌딱지인 아들과의 관계에 한계를 느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부단히 노력한다는 걸 나는 알았다. 아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당신은 아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울퉁불퉁하고 어색하기만 했는데, 아들의 말에 당신의 귀가 열리니 아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열렸다. “미안해”, “괜찮아”, “사랑해”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으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엄마가 모르는 이벤트가 생겨났다. 당신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면, 자신의 일이 바쁘고 또 업무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시간을 빼기가 쉽지 않다고 료타가 말하자 사이키는 아버지라는 역할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역할은 아버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장이 없는 저녁마다 당신과 아들은 장기를 두거나 카드 게임을 했다. 초반에는 패배에 분노한 아들의 곡소리가 지박령처럼 거실을 떠돌더니 차츰 승률이 비슷해지면서 아들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아들이 축구를 배운 이후로는 주말에 시간을 내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케이타가 찍은 사진을 보고 료타는 그제야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사이키의 집으로 찾아간 료타를 외면하며 집 밖으로 나가는 케이타. 료타는 갈라진 두 갈래 길로 화가 난 케이타를 뒤따르면서 아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사랑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고백한다. 키우던 아이가 바뀌었다는 서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두 갈래 길이 다시 만나는 지점에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마주한다. 그리고 한참을 안아준다.
나의 아들은 이제 어디에서도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는 당신이라고 말한다.
낭만 가득한 이 밤, 아들을 먼저 재우고는 당신과 내가 마주 앉아 에드 시런의 곱하기 앨범에 들어있는 <Thinking Out Loud>을 들으며 옛날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당신도 그렇게 아버지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