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 원 쏘니

by E Hana

5월 22일 목요일 새벽 3시 40분, 당신과 나는 강시처럼 벌떡 일어났다. 알람도 없이 눈이 번쩍 띄었다. 그 시각,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경기장에서는 24-25 유로파리그 결승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유로파리그는 유럽 각국 리그 중상위팀이 겨루는 유럽클럽대항전이다. 각국 리그 최고팀들이 나서는 챔피언스리그보다 한 단계 아래 대회이다. 서둘러 TV 전원을 켰다. 빌바오의 함성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잠이 홀딱 깼다.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구미호가 무덤을 파듯 옷장 서랍을 파헤쳐 ‘행운의 티셔츠’를 꺼냈다.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아들의 목에 꿰어 넣으며 “나이스 원 쏘니, 나이스 원 쏜..”을 흥얼거렸다. 행운의 티셔츠는 가슴에 대한민국 국기와 토트넘 로고가 박혀있고, 등엔 ‘손흥민 7’이 적힌 리미티드 티셔츠를 말한다. 얼마 전 맥주 광고에서 자신의 강아지를 애정하는 축구 선수 이름으로 부르거나, 경기를 볼 때 행운의 양말을 꼭 챙기는 모습이 나왔다. 축구 찐 팬들의 모습을 재치 있게 보여준 광고였다. 아들이 쏘니의 경기를 볼 때마다 이 티셔츠를 입는 건, 일종의 그런 의식이었다.


유로파리그 테마곡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토트넘과 맨유의 멸망전이 시작되었다. 역대급으로 리그를 말아먹은 최하위 팀끼리의 결승전이었기에 치열한 혈투가 예상되었다. 그런데, 쏘니가 없었다. 발부상을 우려했지만 결승전이었고, 쏘니는 주장이니까 당연히 선발명단에 있을 줄 알았다. 부주장인 로메로가 주장완장을 차고 그라운드를 밟았다. 단전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눈에서 불을 뿜다가, 당신과 아들을 보니 I wanna be in that number♬(토트넘 응원가 중 한 부분)를, 나는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응원 가사를 따라 부르며 이미 그들과 함께 산 마메스 경기장의 필드를 누비고 있었다. 속없는 남자들..


토트넘은 맨유를 상대로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골키퍼는 비카리오, 풀백과 센터백에 우도기, 반 더 벤, 로메로, 포로가 맡았고, 중원에는 비수마, 벤탄쿠르, 파페 사르가 미드필더로 포진했다. 윙어로 히샬리송과 존슨이,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솔랑케가 출격했다. 쏘니는 벤치에서 출발했다. 부상 이슈로 클루셉스키, 매디슨, 베리발까지 결장한 상태에서 쏘니의 선발 제외는 너무 아쉬웠다.


경기는 지지부진했다. 몇 차례 맨유의 슈팅이 이어졌으나 골망을 흔들진 못했다. 전반 41분 토트넘의 파페 사르가 올린 크로스가 경합과정에서 골대 구석으로 향하는 걸, 존슨이 넘어지면서 공을 건드려 맨유의 골망 구석으로 또르르- 굴러 들어갔다. 이 공은 맨유의 전설적 키퍼 반데사르 할배가 와도 못 막는 공이었다. 토트넘의 선제 득점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빌바오로 날아간 15000명의 토트넘 팬들과 함께 환호했다. 필드에 쏘니가 없다는 사실도 깜빡 잊었다. 존슨의 골이 모양새가 빠진 들 어떻고, 세리머니가 우당탕탕이 된들 어떠랴. 전반전을 1:0으로 리드를 잡은 채 마무리했다는 게 어딘가. 승리의 여신은 우리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양 팀 모두 교체카드 없이 후반전에 돌입했다. 맨유는 동점골을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조급함 때문인지 온갖 패스 미스를 남발했다. 후반 67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키퍼 비카리오가 공을 잡으려고 나오다가 솔랑케와 부딪히면서 볼 처리에 실패했다. 이때 맨유의 호일룬이 빈 골대에 헤딩을 날렸으나 반 더 벤이 몸을 날려 바이시클 킥으로 공을 걷어 내면서 실점을 막았다. 역사에 남을 클리어링이었다. 갑자기 토트넘의 히샬리송이 필드에 드러누웠다. 교체 싸인이었다.


드디어 쏘니가 출격을 알렸다. 도파민이 폭발했다. 관중석에서는 “나이스 원 쏘니”를 외치며 기립박수가 터졌다. 쏘니는 역습 상황에서 침투와 스프린트를 시도하였으나, 부상의 여파가 겹쳐서인지 맨유의 태클과 인터셉트에 막혀 버렸다. 이후, 토트넘은 존슨을 센터백 단소와 교체시키면서 식스백(6명의 수비수)으로 단단히 걸어 잠갔다. 막판에 쏘니가 올린 크로스가 단소와 골대 사이에 떨어졌는데, 아쉽게도 득점에는 실패했다. 맨유 또한 가르나초와 지르쿠지를 투입하고 해리 매과이어를 전방으로 올리며 총공세를 펼쳤으나 토트넘의 완전히 내려앉은 수비와 키퍼 비카리오의 선방쇼에 맥을 못 추렸다. 특히 추가시간에 루크 쇼의 헤더를 비카리오가 막아낸 장면과 카세미루의 바이시클킥은 실패했지만 압권이었다.


조마조마한 시간이 초단위로 지나갔다. 관중을 비추는 카메라에 맨유의 어린 팬이 울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에 등을 돌리고 선 토트넘 팬도 보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경기시간을 다 쓰고, 더하기로 주어진 시간도 지나갔다. 어서 불어라. 어서.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턱에 올려붙였다. 주심이 휘슬을 불어 종료를 알리는 순간, 쏘니가 필드에 주저앉아 오열을 터뜨렸다. 산 마메스 경기장은 토트넘의 승리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당신과 나와 아들은 빌바오에서 전해오는 감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얼싸안고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쏘니의 승리가 마치 우리의 승리인 양 기뻤다. 이 순간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끼고 있다는데 전율이 일었다. 아들은 티셔츠의 목부분을 끌어올려 입을 맞추었다. 이 아이만의 승리 세리머니였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에 아들의 새하얀 티셔츠가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둠에서 시작한 유로파리그의 결승전이 장렬히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역대급 단두대 매치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쏘니가 우리에게 준 것은 영감이었다. 그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때, 때가 되었으니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반평생가까이 살아보니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이제까지 쏘니가 보여준 성실함과 끈기, 노력, 인내, 겸손, 한결같은 열정과 진실함이 모두 켜켜이 쌓여 이루어낸 결과물이리라. 쏘니가 들어 올린 건 단순히 트로피가 아니라 15년간의 선수생활, 수많은 좌절과 아쉬움, 그리고 오직 한 가지 믿음으로 버텨온 지난한 시간들의 결정체였을 것이다. 응당 보상받아 마땅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출근준비도 해야 했고, 학교도 가야 했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영감을 받은 이 시점에 오늘 하루 좀 게을러진들 큰 일이야 나겠는가. 토트넘의 한 팬은 오늘을 기념하며 이 날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안젤라 매디슨 흥민’으로 짓기도 했다는데 말이다.


목요일의 흥분이 다 가시지 않았던 일요일은 아들의 수학경시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아들은 구미호가 무덤을 파듯 옷장 서랍을 파헤쳐 ‘행운의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그들이 쏘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들을 꽉 껴안아 주었다. 그날의 여운이 아직 따뜻하게 남아있었다. 할 수 있다는 영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영감이 아들에게 닿기를 바라며..


조악한 나의 글을 쏘니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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