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이 빠르고, 똑 부러지던 나를 아버지는 공학자가 될 거라 말씀하셨다. 나는 토목기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아들처럼 자랐다. 아버지는 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몹시 바빴다. 오랜만에 보아도 머리를 쓰다듬거나 굳이 안부를 묻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매달려 응석을 부린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아버지도 아주 가끔 내게 부(父) 정을 보여주신 적이 있었다. 몇 달간의 출장으로 집에 들르시지 못하면 아버지는 내게 손 편지를 쓰셨다. 그 시절엔 이메일도 없고, 삐삐도 없었고.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고 함부로 수화기를 들지도 못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스스로 성장하고 항상 도전하며 앞으로 나아가라. 한자가 뒤섞인 편지엔 아버지의 권위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엄마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나의 의무를 강조하셨다. 내가 뭐라고. 어린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엄마의 안위를 당부하셨을까. 구구절절한 그리움과 애틋함은 먼 나라 이웃나라였다. 그러나 어떤 이끌림으로 나는 자연스레 공대 아름이를 꿈꿨다. 사춘기의 강을 건너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삶의 규칙성에 안심했고, 숫자로 읽히는 세상이 좋았다.
대학 입시를 몇 달 앞두고 마음이 뒤죽박죽이던 어느 날, 나는 학교를 째고 자주 가던 프랑스 문화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화원 내의 영화관에서는 무료로 프랑스 영화를 틀어 주었다. 주로 흑백영화를 틀어주었는데, 불어에 영어자막이었다. 나는 제2 외국어조차 독어여서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오히려 그런 생경함이 좋았다. 눈빛으로, 말투로, 분위기로 느끼는 감정은 감각적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몰라도 이브 몽땅, 장 폴 벨몽도, 알랭 드롱 같은 주인공 이름은 알고 있었다.
이 날 나는 50년대 문제작이었던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처음으로 보았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았던 나는 문화원을 나와서부터 며칠을 멍-한 채로 살았다. 내가 아는 영화는 규칙의 산물이었다. 긴장감으로 시작된 영화가 왜?라는 질문에 하나씩 하나씩 답하다가 스토리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 끝을 예측하게 되는 결말까지. 그러나 고다르가 내게 보여준 규칙의 파괴는 충격적이었다.
영화는 이랬다. 험프리 보가트를 동경하던 미셸은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살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차를 훔친다. 자신이 좋아하는 미국인 여자 패트리샤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지만, 두 사람이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다. 패트리샤는 경관에게 미셸의 행방을 알려주고, 미셸에게는 도망치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압권이다. 차도를 달리던 미셸이 경관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다. 패트리샤가 달려와 미셸을 본다. 미셸은 그녀에게 “난 정말 역겹다”라고 말 한 뒤, 죽는 순간에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감겨 버리면서 죽는다. 미셸이 뭐라고 말한 거냐고 경관에게 묻자, “당신은 역겹다”라며 오역해 준다. 패트리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미셸이 자주 따라 하던 험프리 보가트의 엄지로 입술을 닦는 행동을 하면서 “역겹다는 게 무슨 뜻이죠?”라고 묻고는 떠나 버린다.
고다르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영화적 문법을 파괴하면서까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영화는 시종일관 핸드헬드에 점프컷으로 내러티브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고, 화면으로 흘러나오는 재즈에 신경이 거슬렸다. 내 마음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비꼬는 중이었다. 삶의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던 미셸조차 자기 죽음의 시점을 선택하며 죽었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가. 고다르의 영화는 가장 영화답지 않은 영화였다. 원제가 <숨의 끝>이라는 사실을, 그 시절 영화사조였던 누벨바그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탐구였다는 것은 영화과에 입학하고서야 알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의 영혼은 고다르에 잠식된 채로 살았다.
자유롭지 않아서 불행한 건지 불행해서 자유롭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안고 나는 과감히 전공을 바꾸었다. 내가 딴따라가 되겠다고 선언한 날, 아버지는 입을 다무셨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억울함이 밀려올 때마다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올렸다. 책만 두고 내 물건들을 정리했다. 아버지의 울타리에서 내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영화과에 들어가고 밤을 패기 일쑤였던 나는 집을 하숙집처럼 드나들었다. 365일 낡은 청바지에 과잠바만 입고 다녔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영화과 좀비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부전공이 촬영인터라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에 닥치는 대로 용돈을 벌었다. 말이 현장이지 노가다가 따로 없었다.
자기 작품을 찍기 위해 학기마다 돈이 필요하다는 걸 엄마는 몰랐다.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으니 엄마는 나의 고단함을 상상할 수 없었다. 시작은 엄마와의 말다툼이었는데 아버지가 감정을 폭주시켰다. 순식간에 머리채를 잡혔다. 유세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아픈 것보다 자존심이 구겨졌다. 부릅뜬 눈으로 아버지를 마주하며 내 인생 어느 것에도 훈수두지 말라고. 나에게 아버지 지분은 하나도 없다고.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책이었고, 나머지는 그나마 아버지의 돈. 그것도 꼬박꼬박 갚아 드릴 테니 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침묵하시라며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마음속으로 절교를 선언을 했다.
IMF가 터지고 한 두 해는 괜찮았는데, 아버지 회사에도 곧 문제가 생겼다. 1년째 임금 지불이 유예되면서 아버지는 회사와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나중에 연금도 나올 테고, 작은 집도 하나 있었기에 나는 아버지가 타협하시길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꿈쩍 않는 산이었다. 회사와의 갈등이 길어지면서 아버지 낯빛이 점점 변하더니 찬서리 내리던 새벽에 119를 타고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 뇌경색이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시는 동안 나의 절교는 자동으로 철회되었다. 아버지를 모질게 몰아붙이던 지난 시절이 후회스러웠다.
나는 아버지의 인정에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아버지가 바란 공학자는 아니었지만, 영화도 공학이라고. 남자들만 수북한 충무로 촬영팀에서 카메라의 메커니즘 따위는 줄줄 읊는 똘똘이인 나를 대견하게 봐주시길 바랐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그리움의 다른 언어였다는 사실을.. 이 사실을 아버지가 산소호흡기를 낀 채 정신이 깨었다가 까무러치기를 반복하던 여러날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죽고 사는 일이 인력으로 안된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의 병상일지를 적으며 참회록을 써 내려갔다. 뒤늦은 후회를 하며 철이 들어가고 있었다. 촬영이 바빠져 지방에서 한두 달을 보내기 일쑤였지만, 촬영이 끝나면 땀냄새 절은 그대로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머리맡에는 내 책이 몇 권씩 쌓여 있었다. 내가 2편의 상업영화를 끝내고도 2달이 더 지나고서야 아버지는 퇴원할 수 있었다. 가방을 싸는 엄마를 뒤로하고, 아버지는 “우리 딸은 왜 그렇게 외로운 직업을 택했냐”며 다 들리는 혼잣말을 하셨다.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내 마음속에 묵직한 것이 덜어내지는 순간이었다.
아프고 난 뒤, 아버지는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스텝으로 참여한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갈 때는 내 이름부터 찾았다고 엄마가 귀띔해 주었다. 사위를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으셨지만 귀한 손주를 품에 안고서는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셨다. 아들의 이마에, 배에 아버지의 까실한 얼굴을 비볐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아버지의 행복이 느껴졌다. 내 아버지를 웃게 하는 아들이 천 번 만 번 고마웠다.
그런 아버지가 재작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와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버지! 나에게 사랑을 주세요! 수없이 외쳤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남긴 지갑엔 5만 원이 9장 있었는데, 평생 자신을 위해 돈을 쓰신 적이 없었던 아버지가 짠해서 내가 당신 몰래 주머니에 넣어드렸었다. 맛있는 거 사드시랬더니 그렇게 한 푼을 안 썼다.
당신이 출장을 갈 때마다 아들에게 자꾸만 “엄마 잘 지켜줘.” 해서 하루는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빠가 저렇게 말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냐고. “나를 믿는다는 거잖아. 나는 좋지.” 아들이 말한다. 초등학교 4학년도 아는 이 사실을 나는 왜 몰랐을까.
아버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