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게임을 할 거야, 말 거야?

by 붕어빵의 효능

대망의 월요일. 희망퇴직과 권고사직 프로그램이 돌 것이라는 소문이 점점 더 가시화되었고

구체적인 실행안이 수요일에 발표되었다.

아니 사내괴롭힘에 대처하는 것이 당분간의 내 인생 전개인줄 알았는데 이 급 드리프트는 뭐지.

원래 계획은 정신질환으로 인한 3개월의 병가 휴직이었다.

그리고 휴직기간동안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갈지 고민을 좀 해보려고 했다. 사내괴롭힘 조사기간 시 분리의 일환으로 받았던 휴가 기간때는 정말 쉬지도 못하고 마음만 시달린지라 아예 마음 놓고 푹 쉬고 싶기도 했고.

아니 근데 이 급전개는 뭐람.


실제 출근을 하지 않으니(병가 중) 피부로 느낄 수 없지만 정말 아비규환 그자체가 지금 회사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분사, 권고사직, 희망퇴직 프로그램이 한번에 돌아가면서

본인의 소속 팀에 따라 옵션이 각기 달라지게 되었는데

분사로 떨어져 나가는 팀들이 있고, (약간의 자본금만 주고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소리다)

아직 hq에 붙어 있겠으나 권고사직 할당량이 떨어진 조직들이 있고

프로젝트를 종료시키고 희망퇴직을 받는 조직들이 있다. (내가 속한 팀)


분사 조직의 사람들은 자기들은 왜 희망퇴직을 할 수 없냐며 항변 중이고

그 와중에 한정된 자본금과 지원금으로 버텨내야 하니 분사 예정인 조직 내에서도 권고사직이 진행 중이며

권고사직 할당량을 받은 조직원들은 본인이 대상자인지, 눈치 게임 중인데 기왕 이렇게 된거 만일 대상자일 경우 희망퇴직이랑 조건 맞추는 딜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이 또한 난리다.

그리고 더더욱 산 넘어 산인 것은 정리해고가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거다.

불안감과 서로에 대한 비방이 블라인드를 뒤덮고 있다. 아. 블라인드 지워야지 그만 보고 싶다.

이제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 시간아까워.


그 와중에 나는 합격 목걸이를 뽑았다. 희망퇴직신청이 가능한 부서다.

물론 최종 승인이 필요하기는 한데 이미 정신병 걸렸다고 온 회사를 뒤집으며 읍소한 상황에서 어떻게 나를 안 내보내겠는가. 아직 신청 전이지만 나는 주저없이 희망퇴직을 선택할 예정이다.


희망퇴직이 가능한 부서들도 설왕설래가 오간다는데 요즘 이 시장에서 이직이 쉽지 않아서

그냥 다른 부서이동으로 좀 더 버티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과, 희퇴를 결정하는 사람들로 나뉘나 보다.

우리 조직은 가해자 새끼가 (지는 어차피 여기에서 글렀으니) 희퇴 분위기를 종용하면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수근덕 거리고 회의실에서 아주 난리도 아니랜다. 아 꼴보기 싫어.

프로젝트 없어졌으면 pd가 일말의 책임의식이 있어야지 야 희망퇴직이다 개꿀이라니.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태도다. 역시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


나는 게임업계에 미련도 없고 구체적으로 방법은 아직 생각 못 했지만 어쨌든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생계와 부양의 의무도 없다. 그러니 이와중에 회사가 목돈까지 쥐여주고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보너스 금화를 먹은 기분이다.


다만 약간의 찜찜함은 루저가 된 기분, 혹은 내가 앞으로 회사생활을 좀 더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왠지 이직은 안 될 것 같은데 그런게 뭔가 1차 폐기 인증받은 느낌. 여기서 뭐 재수가 좋다면 리싸이클링이 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프로젝트는 폐기되었고 그 맥락에서 무능력자가 된 느낌. 그런게 좀 찝찝하다. 천박하게 이야기해서 시장에서의 나의 가치는 떨어진 거니까.


원래의 나라면 그리고 내가 게임업계에 잔류할 생각이라면 악착같이 이동할 부서를 찾아서

읍소를 해서라도 살아남으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오징어게임의 상금은 어차피 없을 거다. 의미도 없는 게임에 생존자가 되기 위해 영혼을 죽일 필요가 없다.


사실 그간 인생에서 나는 꽤나 많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었다. 학벌 취업 부동산 결혼.

그런 내가 막상 패배를 인정하려니 온몸이 배배 꼬이고 남들 시선이 너무 두렵다.

얼굴에 희망퇴직으로 퇴사한 백수 무능력자라고 써놓고 다니는 것만 같다.

안다. 한문제 틀렸다고 울어제끼는 얄미운 범생이 새끼의 넋두리 같을 것이라는 걸.

하지만 정도를 떠나 트랙 안에서의 경주만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 루저임을 인정하는 것은 꽤나 쉽지 않을 일일 거다. 여러 안전망을 가지고 있는 나조차도 마음이 이렇게 찜찜한데.

그래서 회사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레이스를 계속하는것을 선택할 거다. 아마도.

그게 한국사회에서 구성원들에게 강요된 행동지침이니까.


정말 월급만 남은 회사생활이구나. 이번 회사는.


나중에 꼭 문화부장관 되어서 게임산업 규제 졸라 때릴거다. 오덕새끼들아 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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