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 해 동안 영성회복에 대해 공부 하면서 자아와 욕망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영성의 핵심은 태초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신성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전쟁』, 인도의 정신문화를 엿볼 수 있었던 『마하바리타』와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를 비우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자아를 비우기 위해서는 욕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욕망이 인간 본성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을 버리고 욕망에 사로잡힌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게 영성으로 향하는 출발이 된다. 공부를 하면서부터 일상을 마주하는 순간순간, 내가 선택하는 것들이 욕망에 따른 건지 순리에 따른 건지를 살피게 된다. 그러던 중 대비되는 두 인물이 떠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화가, 고갱과 고흐이다.
수년전이었다. 고갱과 고흐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두 거장의 작품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각각의 인물이 살아온 이력들을 소개해 놓은 후 작품들이 시대 순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나의 성향에 딱 맞는 구성이었다. 나는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작품보다 작가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편이다. 인물을 이해하는 매개체로 작품을 보는 편이라 할 수 있다.
고흐의 삶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그의 인생 대부분이 팍팍한 일상 속에 갇혀 있었다. 기존에 잘 알려져 있었던 그런 사실들로 인해 나에게 떠오르는 고흐의 이미지는 괴팍한 괴짜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그런 고흐의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그의 작품에서는 따스함이 넘쳤다. 사람과 세상과 대한 짙은 애정이 묻어났다. 그러한 느낌이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하나둘, 서서히, 완전히 깨졌다.
고갱의 삶은 고흐와 전혀 달랐다. 고갱은 이상향을 찾아 헤매는 고독한 영혼이었다. 그는 태초의 인간들이 가졌던 때 묻지 않은 본성을 간직한 곳을 찾아 다녔다. 그는 그러한 곳이 지구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어쩌면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삶의 행적이 그림 속에서 꾸밈없이 나타났다. 그가 가졌던 갈망 또한 그대로 표현되었다. 이상을 꿈꾸는 과정에서 반복해서 맛보았음직한 좌절 또한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림을 보는 내내 작품들이 뿜어내는 생명력과 작가 내면의 갈등이 내 안에서 교차되면서 그대로 살아났다. 나는 무거운 것에 짓눌리듯 마음이 힘들었다. 숨이 찼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강인한 표현들로 얼룩져 있었다. 고갱의 작품들을 하나씩 하나씩 감상하는 동안 ‘고갱만큼 처절하게 힘든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사는 동안 끝내 이상향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결국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작품으로 스스로 그것을 구현해 냈다.
그날 두 인물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나에게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고흐의 배고픔과 고갱의 영적 좌절 중 어느 것이 더 힘든 것일까. 시간이 흘러도 그 질문은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삶의 무게를 어디에 두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고픔만큼, 경제적 어려움 보다 더 고통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신적으로 무언가를 갈망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정신적인 허기짐이 배고픔보다 더 고통스러울 사람도 있다. 더욱이 연거푸 좌절 할 때마다 혼자 감내해야 했을 내면의 고통은 타인이 짐작하기 어렵다. 고갱의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숨이 턱턱 막힐 듯 나를 짓눌렀던 게 바로 이거였다. 그의 고통이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는 듯 했다. 반면에 작가는 비록 비루한 삶을 살았을지언정 고흐의 작품들은 감상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다. 도대체 이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욕망의 차이다. 고흐는 그림 그리는 자체를 좋아했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길 원했다. 그는 결코 현실에 굴복하여 그림을 그만두지 않았다. 다만 의식주가 해결되지 못 해 사는 동안 내내 배가 좀 고팠다. 그는 현실에 순응했기에 비록 힘들게 살았지만 세상에 대한 시선이 따뜻했다. 고갱은 이상향을 꿈꾸었지만 끝내 그것을 찾지 못했다. 그는 순응하기엔 너무나 거친 기질을 가진 야생마 같은 사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현실을 부정했기에 사는 동안 내내 외로웠다. 지쳐버린 영혼조차 누구에게서도 위로받지 못했다. 고갱의 그림을 보는 동안 내 마음이 힘들었던 이유였다. 현실을 부정할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
두 사람 중 진짜 좌절했을 사람은 누구일까. 고흐는 화가이기에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켜갈 수 없었던 ‘생활고’라는 일차적 좌절이 있다. 그리고 생전에 그림이 팔리지 못해 예술가로서도 인정받지 못한 ‘작가로서의 좌절’이 보태어졌다. 그에 반해 고갱의 좌절은 욕망에 끌려 다니고 자아에 사로잡혔던 고갱 스스로가 만든 결말이 아니었는지.
202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