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켕』 을 읽고
테레즈 라켕은 각자의 욕망에만 충실했던 두 주인공이 그 욕망 속에 갇혀 서서히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해주는 작품이다. 에밀졸라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욕망들 중 원초적, 육체적 욕망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낸다. 내가 옳고 내가 최고가 되기 위해, 상대는 틀렸고 제어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여 결국은 전쟁으로까지 이르게 되는 인간의 명예욕, 권력욕 등 기타 다양한 욕망은 배제한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고모에게 입양된 테레즈는 몸이 약한 사촌 카미유를 중심으로 일상의 모든 것이 맞추어져 있는 환경에서 성장한다. 자신을 위한 것은 없고 오직 타인(카미유)을 위해서만 그녀가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조성된 억압된 환경이지만, 테레즈는 반항은커녕 저항하지도 그렇다고 복종하지도 않은 채 단지 꾹꾹 눌러 참으며 살아간다. 타고난 강인한 육체에서 흘러넘치는 에너지만큼 그녀가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한 욕망(여기서는 육체적 에로티시즘) 또한 거대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눌러두었던 욕망이 나중에 롤랑을 만나면서 육체적 욕망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다른 계기가 있었다면 그녀의 욕망은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성장하는 동안 사람다운 사람, 인간의 형상을 한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만약 그러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육체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성 에너지 외에 다른 방향으로 뿜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파리로 올 무렵 일상의 변화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품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 부분은 드러난다. 이 때 그녀가 품었던 기대는 단순히 일상을 가꾸어갈 환경의 변화 뿐 아니라, 자기 삶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살게 될 환경을 확인하고는 더 깊은 심연 속으로 자신을 감추어 버리는데,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삶을 체념하면서 번득이는 육체적 욕망만이 남아있는 사람이 된다. 결국 롤랑을 만나면서 억압되어 있던 욕망이 화산처럼 분출하여 그녀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 때 그녀가 실현했다고 느끼는 욕망의 본질은 순전한 쾌락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껏 그녀에게는 쾌락이란 감정 또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강력한 쾌락의 경험과 육체적 욕망의 실현이 그녀로 하여금 빠져나올 수 없는 자력속으로 이끌 때 그녀는 아무런 위기감도 경계심도 갖지 못하고 자신을 통째로 내맡겨 버린다.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지금까지 쾌락은커녕 자신을 위해 숨 쉴 공간이나 이해해 줄 사람 하나 조차 없었던 환경에서 이러한 자극은 어쩌면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롤랑은 지극히 세속적인 계산에서 스스로 쾌락을 선택한 인물이다. 일하기 싫어하고, 타인에게 기대어 빈둥거리며 사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찌질 한 사나이, 돈과 성적 만족이 주어지는 환경을 공짜로 낚아챌 수 있다는 기대로 테레즈에게 헌신한다. 물론 처음엔 단순한 성적 쾌락이 주는 만족감에 끌렸겠지만 쾌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테레즈와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한다. 자신의 욕망만을 실현하기 위해 질주하는 두 인물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인물은 테레즈가 아닐까.
테레즈만큼은 아니지만 카미유 또한 억압된 환경 속에서 자라난다. 성인이 된 후에는 나름대로의 주체성을 찾으려 애쓰지만, 어머니에 의해 주어진 좁은 세상 속에서 살아온 그가 인식하는 주체성에는 한계가 있다. 어머니의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나는 것 일 뿐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꾸려가는 독립적인 부분은 아니다. 철도국장을 등에 업고 쉽게 출세하려는 점 등에서 보여주듯이 카미유에겐 어머니 외에 또 다른 지지자가 필요했을 뿐이다. 한편으론 자기 삶을 회복하고 구성하는 것이 시급하였기에 자신으로 인해 희생당하고 있는 타인(테레즈)은 볼 수 없었다. 죽어가면서까지 테레즈에게 구원을 바라던 그의 모습은 어리석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하다. 어쩌면 카미유에게 테레즈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처음부터 당연한 사람으로 여겼을 수 있다. 부인하고 싶지만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카미유의 욕망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 중 하나의 단면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라켕 부인은 자신이 정한 기준이 곧 상대를 위한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기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인물이다. 허약한 아들에게 지극정성을 들이고 고아인 테레즈를 거두며, 이웃들에겐 친절로 화답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카미유는 내적 저항을 느끼고 테레즈는 분노를 삭이며 이웃들은 은근히 부인을 이용한다. 어쩌면 부인이 정해놓은 기준 안에서의 행복이란 고대의 팍스 로마나, 현재의 팍스 아메리카나의 축소판일 수 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무수한 갈등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욕망을 가질 수 있고 인간이기에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기에 파멸에 이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욕망을 추구하기만 하고 다스리기를 포기한다면, 혹은 다스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혹은 욕망을 쫒아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에밀졸라 역시 이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이라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부분과 함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은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동시에 들여다보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2022.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