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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영 Sep 04. 2022

나와 상관없는 일이 결코 아니야!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읽고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은 피리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렸을 적 피리 부는 사나이 동화를 읽었을 때는 사나이가 왜 아이들을 데리고 가벼렸는지에 대해서 보다 단순히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 가는 광경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이들만 있는 곳에서는 어떤 재미난 일들이 펼쳐질까, 뭐라고 하는 어른들 없이 아이들끼리 있으면 마음껏 신나게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은 사나이가 아이들을 모두 데려가는 선택을 하게 된 배경,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어른들의 이중성, 아이들을 모두 잃은 후 그들이 가질 비통함에 대해 비로소 생각해 본다. 그리고 현재 사회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는 누구이고, 약속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서로 간에 어떤 약속을 했었나를 생각해 본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지금도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동화에서처럼 한꺼번에 데려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함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기가 어렵다는 것이 동화와 현실의 차이다. 


2014년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세월호 사건과 이듬해 메르스 사건, 비슷한 시기에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을 떠올려본다. 부조리와 부당함에 대해 투쟁할 겨를도 없이 바로바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막연한 공포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앞으로 그런 일은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안도감을 갖고 있는 듯 하다. 2020년 시작된 팬데믹도 넓게 보면 환경파괴 등 인간활동의 결과이지만, 2010년대 중반에 연이어 일어났던 세 가지 사건들과는 결이 다른 재난이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 모임에서 얼마 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와 부동산 이야기로 화제가 쏠렸다. 코인 투자를 했다고 한다. 처음엔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손해를 봤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귀 기울여 보니 다른 이야기였다. 지난 정권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고 적은 수익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푸념했다. 인생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것에 대한 상실감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분노와 맞닿아 있었다.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가는 사건들에 대해선 단순한 연민의 감정으로 흘려보낼 수 있음에 비해, 자기 이익에 반하는 사항에서는 민감하게 분노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뭐가 잘못 되었을까?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살아내는 그에게 죽어간 사람들의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는 생각, 즉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인식이었다.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연대의식의 부재, 넓게 보면 영성의 회복이 절실한 지점이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배에 우리 아이가 탈 수도 있었고, 하필이면 내 부모가 입원한 병원이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일 수 있었으며, 내가 사용한 가습기 클리너에 독성물질이 들었을 수도 있다. 운 좋게도 그 순간 나를 비껴갔을 뿐이다. 


우리는 세상과 내가 별개인 듯, 단절되어 있는 듯 착각하며 살다가 내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피리 부는 남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져간 사건이나 이 책속의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문제 모두,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 같은 형태의 사건이 아닐지라도, 내 주변에는 학습현장이 아닌 노동현장으로 내몰리는 아이가 없을지라도, 그것은 비록 청소년 노동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회,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형태의 불행이 우리들에게 닥쳐올 수 있다.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정당한 권리를 보장 받으며 사는 사회가 우리 모두가 바라는 모습이다. 보호받아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노동현장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점에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습현장이 아닌 노동현장으로 들어서야 하는 아이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기에 비록 노동의 현장일지라도 보호받을 권리는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조차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약속의 의미가 어떻게 통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화에서 쥐떼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어른들이 쥐떼가 사라지니 금화 천냥이 아까워 50냥으로 처리해버리는 모습과 겹쳐진다. 


가려진 세상 바깥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 언제 다시 피리 부는 남자가 필릴리 피리소리로 그들을 유혹할지 모르는 공포감도 모른 채 말이다. 피리 부는 남자를 다시 화나게 해서 그가 우리 마을로 찾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소리 없이 사라지는 아이들의 처절한 슬픔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자본 유동성의 증가, 경제침체, 부동산 열풍이라는 금융과 자본의 강풍들 속에 휩쓸려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가 묻히지 않기를 바래본다.


      


2022.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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