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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영 Oct 23. 2022

어느 여성 활동가의 자기 정체성 찾기

인물 에세이

이상은 G시에서 교육과 환경 관련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Y선생을 인터뷰한 내용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현재 Y선생은 00대학교 내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죽였다.”     


  글쓰기에 관해 Y선생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선생께서 문장 하나를 예로 들었다. 

     

“‘나는 나를 죽였다’라는 게 어찌 보면 아주 상투적인 표현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뒤에 그 말을 받쳐주는 아주 강력한 내용이 이어지면 상투적인 표현도 살아난답니다."      


  글쓰기에 관한 대화에서 유독 그 말이 기억에 남았다. 실제 선생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글속에 들어있던 문장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왜 자신을 죽이고 살아야 했을까? 그 문장의 의미를 묻는 나에게 선생은 더욱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들을 해 주셨다. 

  선생은 결혼 후 십년 동안 그동안 가져왔던 가치관과 삶을 모두 부정하고 살았다고 한다. 결혼할 당시에 남편과 약속했다고 한다. 십년 동안은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겠지만 이후에는 내 삶을 살겠다고. 그리고 선생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나를 죽인 시간이 그 십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선생의 삶이 한층 더 궁금해졌다. 선생이 지향했던 가치관과 삶이 무엇일까? 결혼생활 속에서는 왜 그것들을 부정해야만 했을까? 또한 지금의 삶은 어떠할까? 나에게 있어 Y선생은 우리 시대의 지식인으로서나 사회 활동가로서, 그리고 하나의 인격체로도 더할 나위 없이 존경스런 분이셨다. 바깥에서 보았던 활동가로서의 모습과 달리 여성으로서 선생의 삶은 어쩌면 다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Y선생과의 만남     

  Y선생과 나는 5년 전 쯤 G시에 있는 격월간 평론지 읽기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공부하는 모임에 참여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Y선생은 쉽게 볼 수 없는 분이었다. 인내심이 많았고 사람을 포용하는 범위가 넓었다. 온화한 성품도 돋보였다. 모임 중에는 간혹 지성이 부족한 우리가 듣기에도 함량미달인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눈높이에서 맞추어 질문자가 스스로 납득되도록 온화하면서 예리하게 답변을 하셨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좋은 분을 알게 되어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교육 관련 시민운동을 오래 해 오셨다는 것, 얼마 전에 박사 학위를 받고 간간이 강의도 하면서 연구소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점 등 선생의 주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2022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저녁, 선생의 집을 방문한 것은 바깥활동에서 보아온 모습 외에 선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함이었다. 선생의 사회적 활동이 개인적인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했다. 모임에서 잠깐씩 뵈었을 때는 모든 면에서 아쉬운 점이 없는 분인 줄 알았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 보였다. 선생은 오랜 활동가 생활로 인터뷰 경험이 많아 보였다. 낯설어하는 나에게 오히려 이러저러한 것을 배려해 주셨다. 선생의 인품은 작은 곳에서부터 언뜻 언뜻 드러났다.      


대학생활     

  그녀가 사회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대학을 다녔던 때는 암울했던 80년대였다. 그녀는 입학하자마자 그 당시 대부분의 대학에 있었던 학생운동 동아리에 가입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과감하게 부딪힐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그 이면에는 그녀가 가진 특유의 호기심 또한 한 몫 했다. 지금껏 살아왔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대학이라는 공간이 그녀에겐 호기심 그 자체였다. 앎에 대한 욕망이 솟구쳤다. 

  하지만 의욕과 달리 그녀는 동아리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선배들도 하나같이 부르주아지적 성향이 강한 그녀가 험난한 학생운동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아리를 나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스스로 나약해지기 싫었던 그녀는 그러한 시선들에도 불구하고 동아리 생활을 꿋꿋이 이어갔다. 하지만 소녀같이 여린 감성을 타고난 그녀였다. 삭막한 동아리 방에 꽃을 사다 나르기 일쑤였다. 담배냄새 난다고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 그녀는 운동을 하더라도 인간다운 면모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인간다운 면모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부르주아지적 교양이었으며,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족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그런 근성을 짚어내는 선배들이 그녀로서는 너무나 치욕스러웠고 싫었다. 

  기득권 계층이 사회운동을 대하는 관점과 방식은 누구에게도 공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책에서 알게 된 내용을 이론으로만 흡수하였다. 체화되지 못한 이론을 원론적으로만 받아들인 모순이 나중에 그녀의 삶 곳곳에서 파동을 일으키게 될 거란 걸 당시의 그녀로서는 알리 만무했다. 그녀의 사상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사회운동을 그만둘 수 없었다.      



동지애적 결합을 꿈꾸다     

  그러했던 그녀가 결혼에서는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된다. 당시에는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동지애적 결합’의 형태로 결혼하였다. 그녀 역시 결혼에 대해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노동현장에서 16살 남짓 된 구로공단 여공들을 볼 때면 기득권을 가진 자신이 부끄러웠다. 실제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서 노동자들과 결혼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그녀는 마음 아파할 부모님을 떠올리곤 했다. 본인은 그렇게까지는 못 할 것 같았다. 부모님의 바람은 그녀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다. 의사, 교수 등 기득권 계급과 결혼하여 윤택한 삶을 누리길 원하셨다. 그녀는 본인의 의지와 가족의 바람들 속에 타협점을 찾아 기준을 세웠다. 만약 결혼을 한다면 부자, 스카이대 출신, ‘사’자 붙은 직업의 사람과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너무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 이상의 기득권을 가지길 거부했다. 

  결혼에는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하기로 결정한 데는 집안 분위기가 한 몫 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기에 결혼 자체에 별 거부감이 없었다. 결혼을 가부장적이거나 억압적인 것으로 느끼지 않았다. 다만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할 시기에 놓여있던 그녀였기에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님과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녀의 아버지 역시 결혼에 대해 심하게 압박했다. 심지어는 딸이 결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며 그녀의 어머니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을 서둘렀다. 그녀는 결혼을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이라고만 이해했다. 

  남편은 지방에 있는 유수 대학 출신이었다. 그녀의 오빠들은 서울에 소재하는 일류대학 출신들이었고 매부마저 의사였다. 그러다보니 그녀에게 남편은 기득권을 갖기에 약해 보였다. 남편의 그런 점이 그녀는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역의 중심성을 보지 못했다. 남편 또한 그 지역에서는 기득권층에 속하고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녀가 가진 중앙의 사고와 지역의 사고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남편을 동지라고 착각했다. 그러한 섣부른 판단이 그녀의 인생에 미칠 파장을 미처 알지 못했다.     



부조화의 시작     

  그녀와 남편은 2월에 만나서 5월에 결혼하기까지 세 번 만났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결혼이라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추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면 착착 맞추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편과의 만남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남편이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는 파악하지 못했다. 야학을 했다는 남편의 말은 그녀의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서울에서는 야학이 노동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봉사의 개념이라는 것을 그녀는 나중에 알았다. 그녀가 결혼생활 내내 지켜본 결과 그녀의 남편은 운동권의 삶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남편 역시 그녀의 부드러운 모습만 보았다. 그저 자신을 서울에서 내려온 여리고 세련되고 여유로워 보이는 여성으로만 여겼다고 한다. “나는 시민단체를 좀 세게 한다. 밥도 옷도 필요 없고 물질적인 거는 중요하지 않다.”는 그녀의 말을 남편은 ‘검소하게 살구나.’라고 받아들였다. 

  서로간의 이해도에 있어 간격을 안고 시작된 결혼은 처음부터 불안정하게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 십년 동안 그녀는 아내와 엄마, 며느리 등 가부장적 역할에 충실했다. 결혼 후에 요구되는 다양한 역할들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패턴을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그래야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결혼 전에 남편과 했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결혼 생활     

  결혼생활은 그녀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생활을 요구했다. 남편은 그녀가 며느리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부부동반 모임 등에 나가면 아내가 본인보다 주목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는 어른들 위주가 아닌 아이들이 함께 놀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나가곤 했다. 그런 그녀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남편은 싫어했다. 

  그녀는 남편이 벌어준 돈을 시댁에 쓰는 것에 대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백화점 가서 아들 월급 반 정도 되는 옷을 사드렸다. 음식도 손 크게 했다. 이런 그녀의 모습들을 시댁에서는 낯설어했다. 

  남편은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그녀의 친정 남자들 그룹 속에서는 쳐지는 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남편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그녀는 각별히 조심했다. 하지만 자존심은 다른 곳에서 조금씩 깎여지고 있었다. 공대생인 남편은 인문학적 소양이 너무 없었다. 남편의 그런 점이 그녀에겐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남편 또한 그녀가 숫자에 약한 점을 꼬집곤 했다. 뭐 하나 틀리기라도 하면 “봐라, 네 엄마는 더하기도 못한다.”고 비꼬곤 했는데 뼈 있는 농담이었다. 그녀에 비해 남편은 책은 물론 신문도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잘못된 만남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격이 더욱 벌어졌다. 결혼 초기에는 그녀가 불편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아~”하고 받아들였다.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 그렇지”하고 반응을 했다.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잔소리처럼 반복되는 말을 듣기 싫어했고 두 사람의 간극은 커져만 갔다. 

  여하튼 그녀는 십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댁에도 잘하면서 그녀가 어떤 사람이란 걸 남편에게 조금씩 알려주었다. 동시에 다시 시민단체 활동을 할 거라고 끊임없이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남편도 차츰차츰 그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대하는 가부장적 태도 또한 바뀔 거라고 믿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결혼 전에 했던 약속을 십년 후에도 지킬 거라는 사인을 계속 주었고, 마침내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십년이 지난 뒤 그녀가 정말로 사회활동을 시작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남편은 결혼할 때 약속은 했지만 그녀가 실제로 이 정도까지 실행에 옮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차라리 어디 나가서 돈이라도 벌어오라고 하면서도 그녀가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은 싫어했다. 그녀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남편은 지난 십년의 시간처럼 그녀가 집안에만 머물러 있길 원했다. 

  사회운동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남편은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보고 이중적이라고 했다. 그녀를 향해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그녀를 멸시하고 조롱했다. 그녀로서는 가장 가까운 사이여야 할 남편과 일상적인 소통조차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녀가 시댁에 잘해왔던 진심마저 믿어주지 않았다. 결혼생활 동안 그녀가 보여주었던 모든 것은 단지 스스로 정한 계획을 실천한 것일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간극은 이미 많이 벌어져 있었다. 툭하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절망했다. 남편이라는 사람의 인품의 바닥까지 보아야 했다. 결혼생활 막바지에는 우울증이 오고 자살 시도를 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내면의 깨우침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 계신 서울대 출신 교수님과 식사하는 자리에서였다. 그 분이 “그래, 참 쓰레기 같은, 깡패 같은 선배들이 많았지.”라고 얘기했다. 그때 그녀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게 폭력이었다는 것을, 요즘 말로 그루밍 이었다는 걸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비단 대학 선배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남편이 했던 것들도 모두 폭력이었다. 똑같은 패턴이었다. 아버지는 가정 내에서 훨씬 더 안정적인 폭력이었기에 그게 폭력성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선배들에게서 받은 것은 그녀로서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공간 안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전에 몰랐던 자신의 성향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하나는 그녀 속에 내재된 순종적 기질이었다. 친정어머니로부터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순종적인 태도가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었다. 보수적인 가부장적 집안 분위기를 그녀는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대학시절에도 선배들이 무언가 지적하면 본인이 부족해서라고만 생각했다. 한 번도 그 선배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맞추어 살았다. 

  자신을 바로보지 못하는 교조적인 모습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대학생활을 했던 때는 “왜 잘 사는 게 문제예요?”라는 질문을 하기 조차 어려웠을 만큼 살벌한 시대였다. 그래서 그녀는 책을 통해 머리로 이해한 사실을 그대로 자기 삶에 적용시켜 왔다. 자신을 통찰하는 과정이 없었기에 몸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부분들은 그녀 안에서 부조화를 일으켰다. 햇살 가득한 소파에 앉아 마음껏 책을 읽는 게 가장 행복했다던 그녀가 사회운동이라는 소명아래 억압당하고 있는 자기 내면의 울림을 듣지 못했다. 

  그녀 안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또한 있었다. 그러한 욕구로 인해 예전처럼 내면에서 무르익지 않은 모습들이 나타날까 봐 그녀는 두려웠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그녀가 가진 욕구 때문에 사회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리더십으로 포장되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표 자리를 제안 받을 때마다 거부하고 실무자만 수락하곤 했었다. 직책을 맡으면서 인정받는 부분이 그녀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혼생활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자신을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아버지를 피해 결혼을 선택했던 자신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한 굴레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결혼이라는 자기 선택을 버림으로써 자기 각성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은 자기 내면 깊숙한 심연에 존재하는 본질적 자아를 돌아보고 수용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할 수 있었다. 



자기회복     

 그녀가 결혼생활을 더 일찍 끝내지 못 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결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순점들을 합리화하곤 했다. 남편에 대해 실망할 때마다 '나를 너무 좋아해서 빈말을 했구나.'라고 넘겨 왔다. 또 하나는 그녀 역시 정상가족 신화를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적인 부분 역시 컸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당신이 벌어주고 있으니까 내가 시민단체 활동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늘 표현하곤 했다. 

  그랬던 그녀가 50이 넘으면서 이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는 못 살겠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진 순간이 있었다. 남편이 딸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을 때였다. 딸은 그녀를 쏙 빼닮았다. 그전에도 자주 나가라고는 했지만 자식에게까지 그러니 더 이상은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선생은 지금 그녀를 지지해주는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시민단체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좋아하는 공부도 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그녀의 삶속에서 함께 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생명줄이었을 수 있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정 속에서 중간에 조금 삐끗하긴 했지만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스스로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자기 삶을 살기위해 자신의 신념과 가치가 지향하는 쪽으로 계속 향했고, 같은 쪽을 향해 가는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왔다. 만약 스스로 그것을 놓아버렸다면 어쩌면 정신병원에서 오래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웃으면서 이야기 한다.   

  최근에 그녀의 딸이 “어머니가 조금 더 일찍 우리를 다 데리고 나오셨으면 좋았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그때는 엄마가 그런 용기가 없었다, 여러 가지로 엄마가 부족한 상태여서 그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게 너희들에게 하나의 대물림인 되지 않고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딸이 “그러려면 엄마가 더 강하게, 당당하게 살아야 된다. 그럼 우리도 그걸 보고 살 수 있다"고 했다. “엄마가 이렇게 나오긴 했는데 잘 살고 있냐?”고 그녀가 물었더니 딸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딸에게 “고맙다.”고 했다.  



치열했던 80년대     

  선생의 이야기를 통해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그 시대가 개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시에는 학생운동만 했다 하더라도 수감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물며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민주화라는 대의에 청춘을 바치고 삶을 바치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대의에서 중도 이탈하여 사회와 타협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 중에는 스스로의 비겁함에 끊임없이 괴로워했을 사람도 있다. 시간이 흘러 이후에 전개되는 각자의 삶 속에 어두웠던 그 시대의 잔재들이 파편처럼 뿌려졌다. 모세혈관처럼 뻗어있는 각자의 삶 속으로 그것들은 스며들었다. 역사에 기록되거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굵직한 사건이 아닐지라도 그것들이 빚어내는 상처들은 곳곳에 뿌려져 있다. 공지영 씨 소설에서 표현된 상실감의 정서처럼 말이다. 선생의 삶도 거기에서부터 이어져 있다.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선생이었다. 치열했던 청춘의 시기를 거치면서 삶의 행로가 급회전되었다. 선생의 이야기는 거대한 파도처럼 휘몰아친 시대적 가치에 매몰된, 너무나 작고 여린 한 개인이 벌여 온 자기 회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맺음말     

  선생의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나를 죽였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처음에 이해했던 결혼 후 십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내면의 자아가 조화롭지 못했던 시간 모두가 스스로를 죽여야 했던 시간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욕구로 인해 경계를 만들게 되고 누군가가 그것을 침범할 때 폭력이 발생한다. 자기보존에 방해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분화될수록 세밀해지는 관계망 속에서 우리는 예기치 못 한 상황에서 다양한 폭력과 직면하게 된다. 그때는 먼저 그것이 폭력임을 알아채야 한다. 그리고 부당한 것에 맞서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Y선생의 이야기 또한 사회운동가로서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한 인간이 개인 생활 속에서는 권위가 빚어내는 억압과 폭력들을 수용하고 견뎌왔던 이야기다. 그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기와 마주하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여성이었기에 어쩌면 그 과정이 더 가혹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사회운동이라는 가치를 끝내 놓지 않았다. 비록 자기 삶이 쪼개지고 파편화되어 고통스러웠을지라도 평화와 비폭력을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놓지 않고 묵묵히 한 길을 걸어왔다. 그러한 선생의 삶에 대한 태도를 나는 기억하고 싶다. 영화 ‘핵소고지’에 나왔던 대사가 떠오른다.     


“신념을 갖고 있다는 건 가볍게 볼 일이 아니죠. 신념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이니까요.”          


2022.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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