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어도 괜찮아
한참 육아와 양육에 시달릴 때는 하루 몇 시간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여 각자의 공간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너무나 편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직장에서 일할 때처럼 시간을 꼭 엄수해야 하는 일도 없다. 일에 수반되는 과제들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한동안은 습관처럼 시계를 자주 바라보았다.
‘원래는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구나.’
‘원래는 퇴근을 하고 있을 시간이구나.’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너무나 여유롭고 조용한 아침이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은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지만 기분 좋았다. 특히 좋았던 것은 나의 하루를 오직 나를 위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점심을 김밥 같은 것으로 얼렁뚱땅 때우지 않아도 되었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시간을 잘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가 모자라게 늘 바쁘게 머리와 몸을 쓰며 살아왔었고 다 타버려 소멸돼버린 양초처럼 에너지를 매일 모조리 소진시키며 살아온 습관이 있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시간이 너무 안 가고 심심했다. 정작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려 하니 머릿속이 도화지처럼 하얘지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다 보니 이러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식구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행복했다. 식구들이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가정을 보살피고 돌보는 것이 좋았다. 삶의 고비가 찾아왔거나 정신적 고통에 빠진 이들이 상담을 받고 좋아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고 기뻤다. 그들 모두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노력했고 그것이 삶의 보람이고 중요한 가치였던 것 같다.
가정과 일에서 해야 할 모든 과제를 마치고 내려놓은 지금은 새로운 가치를 찾아야 하는 중대한 전환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 헌신하고 희생하려 노력했던 시간들을 덧없는 강물처럼 아쉬움 없이 흘려보내야 한다. 지금은 세상 한가운데에 홀로 문득 문득 쓸모없이 느껴지는 나 자신을 아끼고 돌보아야 하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존재 자체로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도 됩니다.’
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해 주었던 말들이다. 그런 말들을 이제는 나에게 해 줄 차례인 것 같다. 많은 날들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내 앞에는 살아갈 새로운 날들이 또 남아 있다. 이제까지의 삶이 그러했듯이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또 살아볼 만한 것이지 않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모진풍파를 겪은 후 타라의 저택에 홀로 남겨진 스칼렛 오하라가 쓰러진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