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수확

by 태윤상학

날카로운 예각으로 베란다에만 머물던 햇빛이 어느새 거실 창 턱을 한 뼘 이상 넘어와 있다. 서늘한 밤바람에 문 꼭 닫아 밤 기운 단속하는 새 어느덧 이만큼 햇빛이 햇볕이 되어 들어와 있다. 나무를 일렁이며 들어온 바람은 시원하게 다리를 훑고 제 갈길로 내뺀다.


가을이 왔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손을 움켜쥐어 본다. 스르륵 손가락 사이로 건조한 시간들이 빠져나간다. 간절한 기도도 콩죽 같은 수고로움도 쏟지 않았으니 크게 낙심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래도 마음은 늘 무언가를 좇고 있었는 듯하다. 그래서 허전한 손아귀를 건질 무언가를 찾으려 뚫어지게 쳐다본다. 가을이 되면 늘 이런 듯하다.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일관성 없어도 될 것이 참 일관성도 있다. 새삼스러이 또 다짐은 하고 싶지 않다.


엊그저께인 금요일 저녁 무렵에 막내 시누가 다녀갔다.

날짜가 바뀐 밤 1시 무렵에 집으로 돌아갔다. 말이 많은 편이다. 아니 얘기가 많은 편이다. 자기에 관한 이야기가 끝이 없다. 이번엔 그래도 일찍 끝냈다. 언젠가 한 번은 오후 3시 녘에 와서 날짜 바뀐 시각인 밤, 아니 새벽이라고 해야 할 4시가 되어서 돌아갔다. 아마 2박 3일을 얘기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아무튼..

몹시 부지런하다. 그리고 몹시 호기심이 많다. 지적 호기심, 사업 호기심, 사람에 대한 호기심 등 모든 영역에서 호기심이 많다.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을 해서 아는 거다.

지난봄, 어느 날엔 양자 물리학이 궁금하여 대학에서 내놓은 프로그램 신청하여 수강하고 와서는 수박 겉핥기라며 투덜대더니, 이번엔 주말인 토요일에 쉬게 되어 좋겠다고 했더니, ChatGPT 가 뭔지 알고 싶어 몇 명이 모여 배우기로 했다고 한다. 주말조차도 집에 가만히 못 있는 양반이다.

2주간 이탈리아 여행 다녀온 후, 곧장 일본으로 여행, 이어 강원도로 제주도로 골프, 미팅, 연수 등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 따로 없다. 지치는 기색이 없다.

새벽 6시에 기상해서 헬스장에서 1시간 운동 후 출근, 그리고 직종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 참여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가입하여 활동하는 조직도 많다. 그렇다 보니 퇴근 후 저녁 모임도 다반사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를 25시간으로 사는 사람이다. 낮잠을 모르는 사람이다. 아마도 낮잠 한 시간씩 자는 경우가 있는 나의 실태를 알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 죽으면 평생 잘 건데 왜 낮잠을 자느냐는 인물이다.


그녀가 그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은 것도 아마도 부지런히 살아내는 만큼 벌이는 일도, 벌어지는 일도 많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한다.


30여 년 전 결혼해 올 때 시누는 꽃집을 운영하며 꽃꽂이 강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 느닷없이 조경 사업에 뛰어들더니, 이어 전문 조경에서 종합 조경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러다가 토목, 건축이 욕심난다며 여러 번 입에 올리더니 끝내는 관련 면허를 획득하였다. 그러더니 기왕이면 종합 건축이 낫다며 분주히 움직이더니 드디어 종합 건축 면허까지 따내게 되어 지금은 조경에서부터 토목, 종합 건축까지 업종을 두루 경영하고 있다. 그 성장 마디마다 세세히 들려주었기 때문에 거의 낱낱이 다 알고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에 일을 많이 벌리고, 또 벌어지니 한번 만나게 되면 미주알고주알 끝이 없다. 처음 꺼낸 화두에서 다섯 갈래 여섯 갈래로 가지 치며 화두도 자주 잊어서 알려줘야 할 때도 더러 있다.


집으로부터 한 푼의 지원 없이, 결혼도 하지 않아 순전히 홀로의 힘으로 일구어냈으니, 그것도 남자들 세계에서 헤쳐 나왔으니 그 감회가 어떻겠는가. 그래서 본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크다. 지금도 늘 궁리하고 있다. 어떻게 사업을 유지하고 확장시킬 것인지를. 행여나 주변에서 칠십의 나이 들먹이며 '편하게 좀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말이라도 할라치면 큰 소리로 호통친단다. '집구석에 박혀서 무얼 하는데,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라고. 얼마 전에도 나이 50에 이른 조카가 나이 든 이모가 안쓰러워 한마디 했다가 입을 쏙 다물게 했단다. 그 조카는 큰 시누의 둘째 아들로,

시누가 사무실에 데리고 있다가 몇 해전 독립 시켜준 조카로 사무실을 공유해 쓰고 있다.


키 150cm 정도(본인은 157이라고 하는데 언감생심. 절친 중에 157이 있어서 잘안다.)의 작은 키에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남자들도 자기 앞에서는 옴짝달싹 못한단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관급 공사를 주로 수주하여 아래에 있는 업체들에게 하청을 주는 갑의 위치에 있는 현시점에선 나이로나 업계 위계로서나 을의 위치에 있는 하청 업체가 꼼짝 못 할 수밖에. 그러나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무수히 넘어지고 좌충우돌했던 아픔을 알고 있다.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게 현장을 누비며 거친 남자들 세계와 부딪혀 일궈낸 그녀의 오늘이다. 힘들게 쌓아 올린 풍부한 경험으로 업계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도전에도 막힘이 없다. 그래서 당당하고 힘이 있고, 남자들도 굴복할 수밖에 없게 하는 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진정한 프로다.


하루 24시간을 25시간으로 사는 사람의 가을은 손아귀가 아플 정도로 수확이 풍성하리라. 텅 빈 손바닥에 그날 밤 들려준 시누의 풍성하고 찬란한 삶의 수확이 수북이 보인다.


세상에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 즉슨 내가 제일 부족한 부분이다. 바로 '부지런한 천성'이다. 시누만큼 부지런했더라면 중학교 때 꿈꾸었던 삶을 살고 있었을 텐데....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시누의 삶에 자극받아 어쩌고 저쩌고는 하지 않으련다.

여러 번 그렇게 자극받고 노력하겠다 해놓고선 번번이 작심삼일로 끝난 게 부지기수니까. 더 이상 그렇게 본인에게 거듭 실망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나의 템포로 살련다. 앞으로 그래도 4분기가 남아 있다. 방학 마칠 때면 늘 급하게 밀린 일기, 방학 숙제 몰아 해대던 것이 떠오른다. 그때처럼 또 남은기간 몰아서 해야겠다. 마음 분주해진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영 빈손은 아니다. 판도라 상자 저 밑바닥서 파닥파닥 날갯짓 하며 솟아오르는 '희망'처럼, 마음 가득 충만감 주었던 그 성취가 붕 떠오른다. 남프랑스 지중해 해안을, 생폴드방스 산골 마을을 드라이브한 그 용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남의 떡에 너무 흔들렸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한동안은 마음 잃고 가을 앓이를 하리라. 그래도 바람 한번 쐬고 오면 낫는다는 것을 잘 안다. 경주나 한번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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