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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Sep 11. 2021

피할 수 없는 노동의 시대 필연적 우울

 노동의 크기와 우울의 크기가 비례하는 건 아니야.


아이가 없는 기혼 친구들이 간혹 대답이 필요 없는 넋두리 같은 질문을 해온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 모르겠어, 아이를 꼭 낳아야 하나, 아이를 언제 낳을지 모르겠어와 같은.

육아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부터 지금까지,라고 하고 싶은데 여전히 육아는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 하는 시대의 연장선에서 섣불리 아이를 갖는 게 더 행복하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피할 수 없는 노동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힘드니까 갖지마라고 말해줄 수도 없다. 노동 플러스 노동은 노동의 제곱이 아니니까. 노동으로 힘든 삶에 노동을 더 얹는다면 도시락 싸들고 말릴 만 한데 또 노동에 노동이 얹힌다고 정확히 두배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신기하게 육아란게 내겐 그랬다.

얹혀진 노동의 크기 절반은 아이의 웃음이, 엄마라고 불러주는 그 어눌한 발음이 살살 덜어주었다.


삶에 아이를 끼워넣는다는 건 아무리 거대한 나무일지라도 뿌리부터 가지까지 흔들 만큼 강한 바람일 것이다. 가지가 꺽이고 휘어진다한들 그 나무가 여전히 그 나무인 것처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행복의 확신을 아이를 더함으로써 얻을 수 있냐는 질문엔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애매한 대답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의 틈에서 행복을 찾는 게 사람인지라 아이가 없는 일상에도 아이가 함께 하는 일상에도 모두 행복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조금은 더 행복하냐는 관점에서 아이를 갖는 게 맞냐는 물음엔 늘 물음표다.

아이를 갖기 전에도 난 행복하고 가끔 우울했을걸? 그리고 지금도 그래. 늘 그래 왔어.


실은 방구석에서 혼자 안 울어본 사람은 없을걸?

내 친구는 감정에도 무게와 크게, 압력과 같은 실체가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중력처럼 압도적으로 자신을 눌러내리는 감정이란 실체를 직접 경험했다고.

내 경우엔 질퍽하게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늪과 같았었다. 내가 녹아 이대로 구들장에 눌어붙겠다 싶었다. 내가 녹아 흘러 들어간 지층의 안쪽이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란 것도 직감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경미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모두 인정하진 않을 테지만)

쉬고 싶어 퇴사를 앞두고 사람인을 뒤적이는 10년 노동의 쉼표를 찍지 못하는 친구와 회사와의 불협화음으로 힘들어도 노동을 쉽게 끝내지 못하는 친구, 매일 아이와의 사투를 벌이다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질 때 내가 한 것이 노동이 아니라면 무엇이냐며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을 하는 엄마인 친구, 공적인 노동을 위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대가로 지불한 친구 모두.


막상 SNS로만 안부를 전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안부와 현실의 괴리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 친구의 삶이 크게 어긋났다기보다는 새로 사귄 누군가보다 오래된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기가 더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알고 보면 그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였고 내가 해주는 말이 나 스스로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실은 방구석에서 혼자 안 울어본 사람은 없을걸?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우울하지만 이를 내비쳐 남들보다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미덕인 사회에서 패배자이고 나만 힘든게 아니니까라며 이를 악물고 버티는 악바리이며 옆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묘한 위안을 얻고 노동을 이어나가는 위선자일지도 모르겠다.


피할 수 없는 노동의 시대에 필연적인 우울이 그 시작.

우리는 모두 삶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하는 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미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친구도, 쉴 틈 없이 일만 해온 친구도,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도 다 같이 물었다. 나 이제 뭐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

노동을 해도 해도 불안하고 하지 않아도 불안한 것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힌트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혹시나 하는 기대와 결말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무력감으로 자기 계발서나 성공한 사람들의 유튜브를 뒤적거리는 시기가 온다.

어느 성공론자의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사이, 사회적 효용을 창출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교집합을 찾으세요, 라는 말은 너무나 일반론적이고 너무나 명료한 정답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빈 종이 위에 좋아하는 것을 묶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잘하는 것의 동그라미를 그 위에 겹쳐서 그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 한 문제는 시작부터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도대체 뭐야? 내가 잘하는 게 도대체 뭐야?

나는 원을 그리는 것부터가 어려운, 성공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애초에 저 질문은 성공을 갈망하며 나온 게 아니었다.

성공에 대한 조바심이라기엔 나는 이미 점심시간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나른한 점심시간의 행복을 알고 있는 나이인걸.


아마 나와 내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통해서 찾고 싶었던 건 '반짝반짝 빛나는 나'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적도 없는 '나'를 찾고 싶었다. 옳다고 믿었던 정상궤도에서 벗어나 객기를 부릴 수 있는 확실한 어떤 것, 모든 걸 뒤로 한 선택에 따를 불행들을 감수할 수 있는 확실한 어떤 것, 나의 온 영혼을 쏟아부을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그 중 하나는 당연히 나다.


오래된 고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육아 외에 노동이 그저 노동이지 않은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는 노동의 시대에 필연적 우울이 그 시작일 수도 있겠다.

당연히 그 시작엔 나의 친밀한 민과 똔이 함께할 것이다.


다음 릴레이 글 _ @모멘토

https://brunch.co.kr/@momento9/4



Writer _ 똔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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