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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Jan 25. 2022

고수 수다

고수 먹으며 의식의 흐름대로 한 대화

*여기서 고수는 먹는 것(coriander)입니다.



아이를 가진 여자 둘이 시간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전 시간 아이의 보육을 어딘가에 맡기고 있더라도 생활 반경이 35km 이상 떨어진 사람 둘이 만나 까딱해 시간을 놓쳐버릴 경우 아이를 제 시간에 픽업하지 못할 수 있으니 아이의 픽업을 대신해 줄 백업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서도 당일 아침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못할 경우엔 아픈 아이를 두고 어딜 싸돌아다니느냐는 비난을 한 귀로 넘기기엔 마음의 방패가 그리 두껍지도 않고 남아서 집에서 끙끙대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아 언제든지 약속이 취소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날을 잡아야 했다. 대체로 엄마들끼리 잡는 약속은 이랬다. 서로에게 언제든 양해를 구해야 하는 가능성이 낀. 이런 이유로 이미 한 차례 미뤄졌던 약속이었다.


서울역에서 만난 서울 토박이와 만나 경기도 토박이가 어디 갈지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내가 두 살 어린 동생이었기도 했지만 아이 둘에 얼마 전까지 맞벌이 여성이었던 언니에 비해 딸린 혹이 하나인 내가 딴짓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인스타를 둘러보는 시간 같은 것들) 그래서 예전에 SNS에 올라온 고수 케이크를 보았을 때 떠 올랐던 고수로 김치까지 담궈먹을 정도로 고수를 사랑한다는 언니와 함께 고수로 만든 해괴한 케이크를 맛 보러 가기로 했다. 이미 언니를 통해 고수김치의 존재를 안 내게는 고수와 생크림의 조합보다 고수와 액젓, 젓갈의 조화가 더 해괴망측한 것이었으니 그보다 이상하지 않겠지 하는 용기도 생겼다.

오후 2시부터 연다는 카페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른 점심을 먹고 주위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연신 이게 얼마만이야, 를 제창해대며 닭볶음탕에 사리에 볶음밥까지 해치우고 오래되고 때 묵은 노포의 분위기에 마저 감동하며 너무 좋다를 반복해대던 우리는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골목 사이를 구경했다. 그 사이를 파고 든 일명 힙지로의 면모를 발견하면 나 빼고 세상은 변한다는, 나만 뒤쳐지고 있는건가 혹은 나이가 들었나보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던져주면서.


여전히 너무 좋다를 추임새로 넣어주면서도 대화는 아이들에서 멤돌다 세금얘기, 부동산 얘기 그리고 결국은  먹고 살지에 대한 얘기까지 갔다. 결국은 돈인데 시간 또한 돈으로 사야하기 때문에  돈을 위해  시간을 바쳐야는 그런 뺑뺑이 도는 얘기들. 낳기 전에 아이는 대반 알아서 자라는  알았는데 이것도 해줘야 하고 저것도 해줘야 하는데 나만 정말로 아무 것도  하고 있는 그런 현기증 나는 얘기들. 그런 얘기들 속에 앞으로 세상이  살기 좋아질 거란 가정은 조금도 더하지 않은 체로 돈도 없는 처지에 시장이 어떻다 집이 어떻다는 얘기를 한창 떠들다 문득 어느새 내가 노란색인지 빨간색인지    사이에서만 고민하는 기성세대가 되었구나, 라고 터널에 진입해서야 뒤늦게 어둠을 인지한 것같은 얼빠진 기분으로 카페에 들어섰다.

오픈 전부터 카페에 늘어선 줄을 보며 여전히 돈 얘기에 빠져있던 우리 둘이었기에 "이런 카페를 해야 돈을 버는데." 라는 비슷한 말들을 줄줄 꿰며 자리를 잡았다. 막상 고수 케이크를 주문하려고 했는데 블로그의 뜨뜨미지근한 평을 보기도 했고 고수 케이크를 한 입 떠 먹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한 발 물러서는게 어떻냐고 언니를 종용했고 나를 배려해 결국 딜 케이크를 주문하기로 했다. 대신 조금 무난해보이는 고수토닉과 함께.

고수 칵테일


여기서 고수토닉의 맛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_ 내게 고수란 식물이면서도 엽록소 이루어진 것들이 낼 수 없는 식기 세정제의 맛을 내 실은 화학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괴식물이었다. 사장님께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언니와 고수토닉을 먹었을 때 사장님이 퐁퐁을 바르고 컵을 헹구지 않고 그대로 썼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고수로 설거지를 한번 해봐야 겠다는 생각까지.. 그래도 몇 모금 목을 축이니 퐁퐁내음도 익숙해지는 게 다음에 다시 한번 더 마셔볼만 한데?하는 자신감이 생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러나오는 풀내음이 강해져 언니에게 모두 양보했다. 빨리 취하고 싶을 때 먹기 좋은 술이었다.


"언니, 미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웃으려고 한 말인데 실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묘사였다.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딱 적합한,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도 없는 그런 하루들. 그런데 원래 사는 건 그런 것이고 늘 그래왔기 때문에 그게 딱히 불안한 건 아니었다. 모든 걸 다 가진 인생 금수저 인생은 살아본 적도 없었기에 오히려 매끄럽고 이정표가 있는 고속도로가 어색하고 그럴싸해 보이기만 하는 흙길을 쫓아가는 건 나고 자란 품이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모험과 불안을 즐긴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 된 2차전.

엄마에게도 부업이 필요하고 그 부업을 위해 대출이 필요한데 요즘 대출 받는 게 만만치 않으니 그것 또한 문제고, 물건 하나를 팔더라도 SNS에서 소위 인플루언서라는 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도 재능이 필요할까 하는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하다 알바라도 할까요, 했다가 며칠 전 아이가 열이 나 일주일 동안 어린이집에 못 가게 되었을 때 일 하는 엄마라면 난감하다 못 해 회사에서 갖은 눈총은 다 받고 아이를 맡길 데를 찾아야 했을거고 그게 만약 알바였다면 대부분 대타가 반드시 필요한데 갑작스레 일주일이나 대타를 구한다면 민폐 중에 민폐고 짤릴 것은 분명했다. 만약 아이를 맡기고 알바를 나간다면 알바따위에 애를 두고 나간다는 세상 비난이란 비난은 다 들을 각오로 독립운동 임하듯 굳은 마음을 먹어야 할 것이다. 결국 집에서 아이를 전담하면서 돈까지 버는 그런 완벽한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생명이 하나 태어났으니 세상을 뒤엎는 지진같은 변화는 없으나 꼭 한 두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릴만한 존재감을 내는 건 당연한거겠지하는 수 밖에. 꼭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했던 짓과 마찬가지로.


"올해는 소설을 꼭 써보고 싶어요."

멋지단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입 밖으로 내놔야만 결국 해낼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돈은 못 벌게 분명했고 어느 출판사에서도 지면 한 장 나를 위해 내줄 거란 보장도 없지만서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망해도 그냥 망하고 나면 끝인 일이니까. 언니는 언니 나름대로 꼬마빌딩에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해보고 싶다고 했다. 돈도 품도 시간도 많이 드는 일이라 당장은 엄두가 나지 않지만 결국은 해내려면 스스로를 최면시키는 수 밖에 없다. 꿈인지 목표인지 그냥 살기 위한 수단인지 어쨌거나 그 사이에서 우리는 꿈을 꿨고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선택지 사이에 당연히 아이를 껴넣고 마치 내 일처럼 나열했다.

그러다 방심하고 계속 먹다보면 중독된다는 언니의 말에 혹해서 데코로 꽂혀 나온 생(生)고수를 씹자 내가 알던 고수의 맛이 내 혀를 완전히 점령했는데 퐁퐁내가 입 안에 가득 차 입 안은 깨끗해지나 몸은 아파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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