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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Jun 04. 2021

출입국 신고서

직업 : 주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느 순간부터 비행기는 여행의 설렘이 아닌 오가는 단순한 교통수단으로 전락하면서 5시간의 비행이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비행기를 자주 타게 되면서부터 설렘이 아닌 5시간의 인내를 조금 더 편하게 해줄 것들을 미리 챙기는 노하우가 생기게 되었다. 기내용 슬리퍼라든지, 새벽 비행의 경우엔 시차를 고려해 타자마자 안대를 요청해 바로 쪽잠을 챙겨둔다던지, 한국어 자막을 지원하지 않는 비행사의 경우엔 미리 동영상을 다운받아 타기도 했다.

착륙하기 가까워지면 익숙하게 핸드폰의 유심칩을 갈아끼우고는 미리 캡쳐해둔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승무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착륙을 준비하며 종이 한장을 나눠주었다. 세관신고서였다.

익숙하게 이름을 적고 다음칸으로 넘어가려다 순간 망설이고 말았다.


[직업:       ]


이라고 써진 란이 새삼 생소하게 보여서, 나를 정의하는 것 같은 그 단어가 혼란스러워 뭐라고 적어야할지 몰라서. 주부라는 단어가 너무 촌스럽게 느껴져서, 도태된 것만 같아서, 망설이다가 주부라고 적어냈다.




"What do you do"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4년을 살면은 누군가를 소개 받거나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일이 잦았다. 처음 만나는 현지인들은 누구나 으레 당연한 절차라는 듯 인사 뒤에 물어왔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이 질문이 당시의 내겐 가장 피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매번 받는 질문이라면 모범 답안을 만들어 놓을 수 있을 법도 한데 매번 기습처럼 반복되는 당혹감과 자괴감때문인지 '그 질문에 면역 없음'이 드러날까 애써 어색한 미소로 감추기 바빴다.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하고 있다기엔 그 일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없어서 그것이 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 헷갈렸다.

어느 날, 카페에서 마주 앉은 일본인 헤드헌터에게 이직하기 좋은 나이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30살의 나는 외국에 오니 28살이 되어있었고, 인식되는 숫자의 영향은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아직 20대인 나와 30대인 나. 2년만에 나온 첫 직장이 흠이 되지 않는 나이와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애매한 나이 사이에서 오가던 내 마음에 처음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쉽게 두번째 직장을 구했고 그 또한 생각보다 쉽게 그만두었다. 외국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가진 환상도 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일본회사가 가진 특유의 경직된 수직 문화는 일종의 충격이었다.

4천만 킬로미터를 구지 날아와서까지 나를 맞지않는 틀에 구겨넣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생활이란 건 다 그런 거라고 나의 철없음을 꾸짖었지만, 나는 철이 들어야 하는 나이를 몰랐다.

하지만 행복을 찾아 방황하는 나는 행복하지 않았고, 어딘가에 맞춰지는 것도 싫은 반항적인 나와 방황을 견딜 수 없는 유약한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건 모순이지만, 그런 모순덩어리인 내가 존재했다.

여러가지를 시도했지만 좀처럼 마음가는 일이 없었다. 뭘하든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든 게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변이들이 내가 실패했다고 말했으니, 실패라고 여겼다.


그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안부 겸 물어왔다.

요즘 뭐하니?, 무슨 일 하세요?, 뭐하고 지내시나요?

당시엔 이런 질문들이 염탐처럼 느껴질만큼 속이 좁아 있었나보다.


그냥 놀아라고 쿨하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마음이 그만큼 가볍지 못했던 것 같다.

뭔가 하고 있어라고 대답하려고 하면 수익을 내야만 성공, 아니면 실패가 되어버리는 사람들의 인식이 의식됐다. 그렇게 정의된 실패가 내 태도가 되고 내가 될 것 같았다.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갑자기 베트남에 도착한 날 아니다 싶으면 금방 돌아와도 괜찮아라고 말해준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엔 그게 위로이고 격려인 줄 몰랐는데, 4년이 지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다.

그런데 주변에선 내게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했다. 네가 해낸 게 무엇이냐고 끈기가 없다고, 나를 가장 잘 아는 것 같은 사람이 나를 가장 모르는 말로 그것을 무기 삼아 공격했을 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나를 방어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다시 어딘가 소속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이 나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말들 하니까.




당연히 아이는 갖고 싶지 않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왜 아이를 안 갖나요라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이를 갖는 것이 두렵다고, 그 중에서 당신의 시선이 제일 무섭다고.

이런 상태로 아이를 갖게 된다면 25%의 청년 실업률을 구성하는 사람에서 경력단절녀 20%에 속하게 되겠지. 아이를 갖는 일이 영원한 도태가 될까봐, 그래서 아이를 갖기 두려웠다. 그런데 우습게도 아이를 갖고 나니 그 어떤 이도 내게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를 안고 함께 다니니 그 누구도 내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무슨 일을 하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마치 아이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듯 사람들은 아이를 보고 나를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질문들이 사라지자 내게서도 이전의 내가 잊혀져갔다.

육아가 시작되면서 느끼게 된 고독과 단절, 피로, 그리고 행복까지와는 별개로 육아와 관계없는 것들은 나 스스로를 포함해 잊혀져갔다.

엄마들끼리 모이는 모임에도 나가기 시작했고, '누구의 엄마'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졌고, 아이가 몇개월인가요라는 질문에 익숙해졌다. 내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이었는데. 내가 행복해서 안정적인 건지 안정적이라 행복한 건지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를 가지는 건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행복이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아이와 함께 비행기에 타야했다. 2개월 주기의 아이의 예방접종 일정에 맞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비행기였지만 조금 더 피로하고 조금 더 곤두선 채 의자에 앉아 5시간을 버텼다. 그러다 다시 한번 세관신고서를 받아들고 재빠르게 직업란에 주부라고 적고 여권사이에 끼워놓았다.


순간 '다행이야'라는 안도감이 들면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뭐가?

구멍난 안도감 사이로 불안이 다시 차오르는 것 같았다.



[직업: 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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