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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Jul 24. 2021

아빠의 장례식을 상상했다, 무덤덤한 내가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으나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빈소는 반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반지하였다. 계단을 내려가며 정면으로 보이는 여자를 알아보았다. 친척 언니인 지현이었다. 외에도 모르는 얼굴들과 고모의 얼굴이 합쳐 10명은 되어 보였다. 장례식장에 간 것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많은 가족이 서 있는 장례식장은 처음이었다. 준비해온 봉투를 주섬 꺼내며 단상 위로 올라서자 고모가 다가와 붉게 부은 눈으로 말했다.


"가서 앞에 있는 꽃 뽑아서 올려놓고 3초 묵념하고 나오면 돼"


나는 서른이 넘은 한 아이의 엄마였지만 아직 고모에겐 어린아이였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본지가 얼마나 되었더라, 20년이 넘었는데 결혼식장에서 보았지만 서로의 기억에 크게 남아있는 건 20년 전일 것이다. 내 기억 속의 고모는 뼈속까지 기독교인이었고 내게 만날 때마다 수시로 전도를 시도하는 사람이었다. 아직까지 뇌리에 남는 그녀의 말은 '네가 교회를 안 다니면 부모님이 지옥에 가'였다. 엄마의 분노까지 더해 그녀는 가족이라기보단 적의 포지션에 가까웠다.


고모의 설명을 들으며 그저 네네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안심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인 장례식이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을 실수 없이 능숙하게 재연해내야 한다는 것에 부담이 있었는데, 고모의 설명을 들으니 알고 있던 거랑 크게 다르지 않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고모부의 영정사진을 마주하자 온 엮인 기억과 감정들이 떠오르며 나는 차가워졌다. 그저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애도였는데 사춘기 소녀마냥 울퉁불퉁 드러난 마모된 감정의 끝들이 곤두섰다. 순수하게 하지 못했다. 멀어진 친척이란 더 이상 가족의 위치도 아닌, 오히려 타인보다도 더 멀어진 사이가 아닌가. 여태까지로만 치자면 평생을 무관심과 비호감으로 대했던 이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동정하기엔 이질감이 들었고, 한 사람으로서 단순히 한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타인인 마냥 죄책감이 들었다.

묵념을 하고 돌아서자 열 명의 스무 개의 벌겋게 부은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쳐다보지 못하고 목례를 하니 다음 사람이 기다려 어정쩡하게 목례를 두 번 더 하고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세보다 마음이 더 부끄러웠다. 뒤통수가 뜨거워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했다.


 "처음이라 어색했지" 식당으로 고모가 따라 들어왔다.

아니요, 처음이라 어색했던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빠와 앉아서 묵묵히 나온 음식을 다 먹었다. 반가운 얼굴은 여전히 하나도 없었다.


빈소에서 나가려는 계단을 오르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친척 언니였다. 언니의 얼굴은 볼 때마다 익숙하지 않지만 새롭지도 않았다. 길에서 스쳐 지나간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날의 언니의 눈은 기억이 난다. 슬픔에 시뻘겋게 절여있는 눈이었다. 언니가 애써 따라 나오며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곤 '아빠한테 잘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순간 왜인지 모르겠으나 내 마음속에서 일렁였던 것은 다시 한번 분노였다. 아니, 실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말이 아버지의 가족이자 나의 적, 내 삶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에 더 반응했다는 것이다.


우리 아빠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20년 넘게 엄마의 인생의 절반을 얼룩져놨어요.

그게 최선은 아니었을거에요, 함부로 건네진 당부 같은 작별인사가 얼마나 안일한 건지 아나요.

라고 내 감정을 쏘아붙였다면 내 맘이 더 편했을까. 알 수 없는 감정들로 꽉 막힌 가슴이 답답해졌다. 별 거 아닌 말로 실금이 가 있던 마음이 깨져버렸다. 하고 싶은 말을 꾹 누르고 네라고 대답하고 끝까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돌아 나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 운전석에 앉은 아빠를 흘겨보았다. 도대체 왜 이제 와서 당신의 가족을 내 안에 구겨 넣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을 열심히 추억하려 했지만, 다정했던 아빠의 모습이 단 한순간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처럼 끝까지 이기적인 모습일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했다. 무엇이든 차가운 것이 넘어가면 괜찮을 것 같았다.


"농기구에 깔려 돌아가셨대, 너희 고모 속이 얼마나 썩겠니"

또 시작이다 싶었다, 형편없는 남편과 아빠이고서 밖에선 착한 사람인 척하는 것, 이제야 자신만의 삶을 찾을 수 있다는 듯 피해자인 척 구는 것. 들 숨이 장까지 안으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구나라고 남의 일 마냥 무덤덤히 대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인 셈이었다.

숨을 더 크게 들이마시고 싶었다. 가능한 자주.


아빠의 장례식을 상상했다. 그 속에 무덤덤한 내가 있었다.

상상 속의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데 그걸 상상하는 내 눈엔 눈물이 맺힐 듯 말 듯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아이의 머리를 베개에 뉘이는 순간까지 오늘 하루를 복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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