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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우리 엄마

엄마의 인생, 이제 따뜻한 봄날만 남아 있길...

by 쭘볼 니나

내 인생도 소설 2편쯤은 나올 거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엄마 인생은 대하소설쯤 될 것도 같다.


어려서 나에겐 외갓집이 두 곳이었다.

초등 저학년까지는 원래 다른 집들도 외갓집이 두 곳인 줄 알았다.

초등 5학년이 넘어서야 제대로 알았던 것 같다.

엄마의 키워준 엄마, 낳아준 엄마가 다르다는 것을.


동화책에 보면 계모는 늘 사악하다.

엄마를 키워준 외할머니는 다행스럽게도 사악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너무나도 엄격했던 외할아버지가 엄마에게 회초리를 들 때 외할머니는 늘 말렸다고 한다.

엄마는 최근까지도 키워준 외할머니에게 엄마라고 불렀다.

우리가 형편이 괜찮았던 시절, 나와 나의 형제자매가 외갓집에 놀러 갈 때면 근사한 반찬에 제법 풍요롭게 우리를 맞이했었다.


엄마에게도 부모가 같은 동복 이모가 있다.

외조부모님은 이혼하면서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이모는 외할머니가 키우기로 하셨다고 한다.

외갓집은 지금 생각해도 꽤 잘 사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 놀러 가면 아주 큰 화단이 한가운데에 있고, 양쪽으로는 셋집들이 즐비해 있었다.

뒷마당에도 세놓은 집이 있었고, 뒷마당 한가운데에는 큰 욕조 같은 목욕시설(?)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동네 유지(?)였던 듯 싶다.

나중에 들으니 젊은 시절 폐교를 사서 부동산을 하며 꽤 큰돈을 버셨다고 한다.


그 시절 그렇게 잘 살았는데도

엄마는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엄마의 배다른 동생들 중 이모는 고등학교, 외삼촌 둘은 대학교까지 나왔는데도 말이다.

외할머니는 사악한 계모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다정한 엄마도 아니었고,

엄마를 딸처럼 키웠는지도 의구심이 든다.


언젠가 우리 집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던 어느 날, 난 부자인 외갓집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 엄마는 집을 나가 돈을 벌어 오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사라지는 게 너무나도 무서워 외갓집에 가서 도와달라고 했다.

외할머니는 계모지만, 외할아버지는 친부모니까 분명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 먼 길이었는데 혼자 갔다.


근데 난 빈손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외갓집도 형편이 어렵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손바닥 안의 호두알만 소리를 내며 굴릴 뿐 아무 말씀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어린 나의 눈으로도 할아버지는 3-4층 쯤되는 건물을 갖고 있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건물이 몇 채는 더 있었던 것 같다)

배다른 외삼촌은 집을 사서 분가를 시켰던 쯤이었다.


외할머니는 사악한 계모는 아니지만, 그냥 계모였다.

외할아버지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고,

나를 버스터미널에 바래다 주던 외할머니는 계속해서 내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으셨다.

엄마가 친딸이었어도 똑같았을까


배다른 이모는 몇 년 후 유치원을 차려서 원장님이 되었다고 한다.


엄마는 이런 엄마를 두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친엄마가 아닌 사람을 엄마로 여기며 사는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조건적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모녀지간이 아닌,

그런 엄마와 사는 집은...지금 상상해 봐도 뼈에 사무치게 외로웠을 것 같다.


엄마는 결혼식을 올리던 날도 설거지를 하고 나왔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 우리 할아버지인 시아버님을 모시고 1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결혼해서 마음 편한 여자는 나밖에 없을 거라고, 엄마는 말했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엄마는 결혼하고 나서 친엄마를 찾았다.


진짜 외할머니는 너무도 가난했다.

재혼을 한 남자는 착하기는 했지만, 생활능력이 없었다고 한다.

엄마 밑으로 동복의 여동생, 이복 남매들도 알게 되었다.

새로 찾은 이모들과 삼촌은 정말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외할아버지 댁에 가면 못 사는 천덕꾸러기 같은 우리 남매들이

진짜 외할머니댁에 가면 귀한 존재가 되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이모의 아들이 내가 보던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을 때,

찐외할머니는 내가 재밌게 보고 있는 것을 돌렸다면서 그 아이를 혼내셨다.

외삼촌은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시켜주었다.

웃긴 건 외할머니의 막둥 삼촌은 우리 오빠보다도 겨우 2살 많을 뿐이었는데,

외삼촌 노릇을 톡톡히 믿음직스럽게 하셨다.


진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정말 그 많은 재산 중에서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류분 청구라도 해보는 건데,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우리 엄마는 걱정되지 않았던 걸까.

이미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 떵떵거리며 살던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은 걱정할 것도 없었을텐데..

부모가 되고 보니 외할아버지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이후로 외할아버지 댁과는 서서히 연락이 끊어져갔다.

얼마 전 계모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 가 보니 자식의 이름들 중에 엄마의 이름은 없었다.

남은 자식들과 아버지는 같았을 텐데

어떻게 같이 자란 언니이자 누나인 엄마의 이름을 아무도 적어주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엄마는 그저 천덕꾸러기 피붙이였나 보다.


진짜 외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신다.

백 세까지 얼마 안 남았다.

아직도 정정하시고, 내 이름도, 내 목소리도 너무 잘 기억하신다.

그런데 아직도 가난으로 너무 힘드시다.

그 연세에도 가난에 너무 찌들어 살고 계신다.

이모들과 외삼촌도 여전히 사는 게 어렵다.


나는 가난을 안다.

가난이 얼마나 사람을 작아지게 하는지,

얼마나 세상에 억울함을 만드는지.


우리 집이 폭삭 망했던 그때,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다.

엄마는 똑같이 가난했던 동복의 찐이모에게 20만 원만 빌려달라고 전화를 했었다.

그 돈을 내가 은행으로 찾으러 갔었다.

돈 천원이 너무나도 아쉬웠던 그때,

통장을 보니 기대했던 금액에 10만원이 더해진 3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그 이모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어린 마음에도 역시 핏줄인가 싶었다.


난 지금도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중학생 어린 나이에도 그 돈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너무나도 돈이 절실했을 때, 10만 원이나 더 입금되었던 기쁨과 고마움의 감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얼마 전 진짜 외할머니에게 용돈을 입금해 드렸다.

할머니는 용돈 준 적도 없는 손주에게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정말 정말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뿌듯했다.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용돈 이야기를 듣고서 나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에게 용돈을 보내줘서 정말 고맙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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