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중심

by 배준현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문구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 기억에 이 프레이즈는 '좀 별로다' 싶었던 게 있다. 바로 '자살의 반대말은 살자입니다' 같은 문장이다. 그건 정말 기발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말이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자살의 반대말은 타살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다시 생각해도 그 문장은 정말 좀 그랬다. 삶과 죽음을 저울질하는 사람에게 그 같은 유희적 표현은 당연히 통할리 없었다. (물론 당시에는 진지하게 고민한 문장이었겠지만.) 그건 탁상공론과 아재 개그가 이룩한 헬조합의 쾌거라고까지 생각했다. 이해와 공감의 흔적 대신 유희와 도단의 공간만을 남겼다. 마포대교의 말랑한 문구들도 떠오른다. SNS 태그 같은 문장들은 한때 참신함으로 인해 상당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위적으로 지워진 채 한층 더 높아진 펜스 아래 그 형체만이 남았다. 다 누군가를 위한 수사적(rhetorical) 노력임에는 분명했지만 여러모로 씁쓸한 뒷얘기를 남겼다. 물론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해야겠지만 적어도 통계적 수치에서는 그 자살 방지 문구의 효과가 미미했기에 지금은 모두 회수된 상태다. 물론 애초 이 같은 문구의 효과를 기대한 나의 태도도 문제다.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한 언어적 표현은 우리 주변에 또 있다. 근래 들어 눈에 들어왔던 건 바로 성희롱과 성적 수치심에 관한 내용이었다. 알게 모르게, 또 의식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기본 용어처럼 사용해 왔던 것들이다. 이에 대해 보다 중립적이고, 가치 판단이 유보된 뜻풀이로 개정할 것을 2022년 3월에 법무부가 권고했다. 매체를 통해 알게 된 개정 내용은 대략 이렇다. 먼저, 성희롱이라는 말은 성범죄를 희화화하고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시킬 우려가 높다고 한다. 성희롱은 성범죄에 대한 유희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성희롱'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우리는 '희롱'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는 '장난, 짓궂음 혹은 별 것 아닌 일' 같이 가벼운 일상적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또,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따라서 해당 용어는 성적 괴롭힘, 성적학대, 성적 불쾌감으로 가해자의 행위를 강조하는 단어로 대체 중에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쌍방의 당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간 성적 수치심이라는 상태를 강조하면서 피해자의 심리적 위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명한 구분이 전제돼야 한다.) 듣고 보니 설득됐고, 나 또한 그런 문제와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용어 사용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금 반성했다.


'문화재'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건축물은 물론 사람이나 동물에게까지 우리는 문화'재'라는 표현을 써왔다. 그런데 돈이나 재화적 가치로만 사람, 동물을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유산'으로 그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다. 듣고 보면 이것도 납득이 간다. '무형문화재, 인간문화재'라는 말을 곱씹다 보니 많은 유산들을 재산, 물건처럼 여긴다는 느낌을 받는다. 뭐 물론 뉴스를 통해 운동선수들 몸값이 얼만지 듣는 경우랑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값은 현재의 환금성이 개입된 것이고, 이 같은 국가유산의 성격은 말 그대로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장기간의 전승과 계승을 포함한다. 어쨌든 다시 한번 말의 무게중심과 묘하게 개입된 가치판단의 결을 따라가 본다.


물론 시대에 따라 다시 예전 용어를 호출하는 경우도 있다.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인식에 따라 말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흑인을 뜻하는 'black'이라는 말이 다시 새롭게 대문자 B를 통해 'Black'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여전히 미국의 흑인을 African-American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용어에는 아프리카에서 오지 않은 흑인들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점점 공감의 자리를 잃고 있다. 또 흑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전면에 스스로 Black이라는 용어를 내걸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축적한 미국 내 흑인들의 정체적 자신감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경멸의 의미로 쓰였던 과거 표현이, 지금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적절한 용어로 탈바꿈 중에 있다. 그들 스스로의 심리정서적 변화로 말이다. (물론 점점 심해지는 백인과의 양극적 대립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정의 내리기, 규명하기, 이름 붙이기에도 기본적으로 힘의 논리가 작동한다. 그래서 당사자의 입장이나 정서적 상황이 고려되지 않기도 한다. 나만해도 당장 개명한 몇몇 사람들에게 여전히 예전 이름으로 호명한다. 나름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이름으로 살아온 그들도 나름의 기억이 생겼다. 나의 추억만큼이나, 새로운 시간에 쌓은 개명 속 추억도 점점점 무게를 더해갈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젠 조금씩 새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려 한다. 표현의 무게를 그들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옮겨본다.


(!) 그래도 어떻게 슬기를 윤서라 부르고, 명래를 승혁이라 부르나. 하.. 간격이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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