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이 놀았다. 그렇다고 잘 노는 것도 아닌데 오래 놀긴 오래 놀았다. '노는 것 = 무능력'이라는 사회적 등식이 성립하기에 논다는 것도 생각만큼 막 자유롭진 않았다. 놀면서도 또 남의 눈치는 정도껏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놀면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사람마다 자기 활동 시간이 참 다양하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은 모를 수 있지만 9 to 6 이외의 삶도 꽤 다양하다. 왜, 예전 학교 때 조퇴하거나 결석한 날에 밖에 나가면 세상 그렇게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일 수 없는 것처럼 이때의 시간은 정말 다르게 흘러간다. 어르신들의 산책 시간, 엄마들의 등원 후 운동, 쇼핑, 마트 생활, 아이들의 학원 생활 등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세대들의 분주함을 목격할 수 있다. 만약 이 시간대에 은행이나 동사무소에라도 간다면 뉴스에 나오는 행원들과 공무원들의 고충이 슬쩍슬쩍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나는 행정복지센터라는 말이 아직 어색하다. 애초 '행복센터'라는 축약어를 염두에 둔 매우 작위적인 네이밍이라서 그런 듯싶다.) 새로운 시간에 적응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일 낮 시간에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방황하는 눈빛을 장착하고 부인을 내비 삼아 따라다니는 은퇴한 아저씨들도 볼 수 있다. 내던질 명함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대에 내던져진 그 현존재들을 통해 삶의 무상함을 조기 학습하기도 한다.
놀다가도 가끔 바쁜 날이면 왠지 뿌듯함이 느껴진다. 하고 싶은 일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을 처리했을 뿐인데도 그날은 내가 기특하기까지 하다. 맨투맨 티셔츠 사이즈 교환하러 근처 스파 매장 들렀다가, 이어폰 고장 때문에 AS센터에 갔다가, 머리 자르고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도 마치면 그렇게 내가 대견할 수 없다. 딱히 생산적이지도 않고, 정서적 완충이 된 것도 아니지만 그날은 뭐랄까 참 풍족한 기분이다. 이런 충만함을 자극한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내 생각엔 그냥 분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행을 떠올려봐도 대충 비슷하다. 우리가 해외여행, 아니면 제주도라도 가야지 뭔가 여행의 기분이 드는 이유도 비행이라는 고속 경험에서 온 착각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 그대로 몇 백 킬로미터를 접어서 이동한 일종의 축지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대략 10km 상공에서 1000km/h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는 경험은 우리의 일상적 휴먼스케일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같은 목적지라도 걸어가는 사람, 자전거 탄 사람, 차 탄 사람 그리고 헬기로 가는 사람의 심리적 마인드 셋은 분명 차이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빠르고 바쁠 때 그리고 일상의 스케일에서 벗어났을 때 보다 자신을 유능하게 여긴다. 그리고 동시에 그때 또 거만해지기도 한다. 다른 얘기지만 유력 인사들도 그런 이유 때문에 의전과 특권에 중독된다. 몹시 초라하게 보이는 일상적 자신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과 구별되는 환경에 대한 집착은 바로 자신의 유능함에 대한 환상과도 직결된다.
유능함에 대한 환상만큼 무능함에 대한 환상도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놀 때 따라오는 불안한 정서다. 뭐 이왕이면 여럿이서 함께 놀면 좋겠지만, 혼자 놀게 되면 이런 불안은 어느 순간 툭 터져버릴 수 있다. 정서 교환이나 반응 확인이 즉각적이고 실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응 참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 혼자 이렇게 살고 있나?' 뭐 이런 내적 메시지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래서 '나 혼자 산다'면서도 그렇게 자기 삶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온라인 댓글을 주고받고 영상을 계속 시청해도 결코 해소할 수 없는 근본적 정서 대역폭이다. 내 반응에 대한 상대의 즉각적 피드를 확인하는 게 그만큼 중요할 수 있다. 특히 다른 포유류보다 유독 더디게 성장하는 인간의 영유아적 특성상 상대 감정에 반응하는 우리의 능력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크게 발달한다. 그래서 비대면 사회는 인간에게 불리한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정제된 상황과 메시지 속에서 사회적 반응을 잃고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 놀 때도 잘 놀아야 한다. 번아웃 직전에 놓인 사람이라면 그냥 일단 쉬고 놀면 된다. 성찰과 반성, 자기와의 대화 다 이런 거 제쳐두고 그냥 놀고먹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잉여로운 삶'을 사는 게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야말로 무한한 자유와 광활한 시공에 놓인 코스모스적 존재라면 좀 얘기가 달라진다. 가능한 생산적 해석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요소요소를 구석구석에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조금 오버해서 표현하자면 '염두에 둔 세상에 대한 창조주적 해석'을 가미해야 한다. 당면한 시대적 상황과 나 그리고 주변의 흐름 등을 참조해서 적확한 내 해석과 이해를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이 정당하고 타자 수용적이면 된다. 그러면 나의 세계는 불안함에 잠식당하지 않고, 자연스레 침식된 홈 파인 고유성까지 얻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패인 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보태가다 보면 세상에 대한 근본적 불안은 조금씩 희석되고, 이해할 수 있는 삶의 지평은 좀 더 넓어진다. 넓게 봐야 덜 불안하다는 얘기를 이상하게도 표현했다.
(!) 빠담빠담빠담, 가슴 뛸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건 참 슬픈 얘기다. 새로운 해석과 발견이 설렘을 주기도 하지만 그건 인식적 바쁨과 주로 연결돼 있다. 적정 템포 이상의 물리적 심박도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의 문제는 발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머리의 문제는 우리의 두 발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최근의 러닝 열풍은 그래서 함의하는 바가 크다. 제주도 올레길을 비롯해 전국의 여러 둘레길도 많은 사람의 고민을 해결해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