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만 만나도 좋다던 그가 어느 날 이별을 통보했다. 이유는 바로 만남의 횟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연애 초 자기 시간이 꼭 필요하다던 주장과는 다르게 관계가 쌓이면 쌓일수록 오히려 그는 만남의 횟수에 집착했다. 주중에는 각자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고 주말에 상봉하는 이 각별함이 더욱 애틋한 감정을 만들어주리라는 환상은 깨졌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 믿음은 신념으로만 구축되지 않았다. '자주 봐야 정든다'라는 말의 힘을 체감했다. 장거리 연애의 낭만과 실재를 또 한 번 확인했다. 국제커플들, 정말 대단하다.
주말에도 만나던 그와도 역시 헤어졌다. 이번엔 자기만의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자기만의 방도 아닌 자기만의 시간이라니. 어쨌든 버지니아 울프보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그와도 역시 헤어졌다. 온오프라인 모두 연결돼 있던 우리는 서로의 관심과 보살핌에 차츰 소진돼가고 있었다. 오래된 연인은 아니었지만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라는 노래처럼 우리는 저녁이 되면 의무감만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시간이 지나 로버트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 만약 삼각형이라면 그 꼭짓점은 친밀감, 열정, 헌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중 한 축이라도 무너져 내리면 삼각형은 유지되지 않는다. 우리 사랑에 친밀감은 있었지만 차차 열정이 식으면서 헌신의 빈 공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익을수록 푸석해지는 관계의 건조함이 만날수록 식어가는 차가운 태도와 더해져 남아있던 열정과 헌신의 작은 불꽃마저 제압하기에 이르렀다. 사랑은 진화되었다.
만남의 빈도는 연락의 횟수와도 비례했다. 자주 만나지 않으면 연락도 뜸해진다. 다시 연락이 뜸해지면 다음 만남도 기약이 없다. 이건 비단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친구와 동료, 선후배들과의 우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까지 멀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서운하거나 아쉬운 일도 아니다. 나와 그들, 우리의 인력이 변화한 것뿐이다. 두 물체 사이에 거리가 생기면 그 거리의 제곱만큼 인력이 약해진다고 하니 사람 간 관계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이틀을 안 보면 나흘의 공백이 생기고, 열흘을 안 보면 무려 백일의 거리감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조금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마음의 회복은 그만큼 어렵다. 여기에 더해 인력 변화를 조정하는 사회적 이벤트까지 생긴다면 거리감은 더 증폭된다. 지금도 진행 중인 코로나-19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을 통해 팬데믹을 1차적으로 극복했지만 타인은 곧 바이러스라는 인식의 전염까지는 막지 못했다. 콜록거리는 누군가의 기침소리는 우리에게 면역반응을 제공하는 시그널이 되었고, 큰 재채기 소리는 그의 주변을 벗어나라는 경고음으로까지 들린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물리적 연결은 재개되었지만 제곱만큼 벌어진 친밀감과 익숙함이라는 감정은 여전히 거리두기 진행 중이다.
'땋은 금발', 골디락스라고 불리는 한 소녀의 이야기도 절묘한 거리감을 일깨운다. 천문과 경제 영역에서 자주 인용하는 골디락스와 세 마리 곰 이야기는 골디락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곰 가족의 집에 들어가 자신에게 딱 맞는 의자, 적당한 온도의 죽, 딱딱하지도 물렁하지도 않은 침대를 선택하는 일련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세 가지 과정 중에서도 주로 따뜻한 죽을 통해 여러 가지 것들을 설명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죽의 온도를 통해 천문학에서는 생명체가 살만한 온화한 지역을 골디락스 존, 골디락스 행성이라 부르고 경제학에서는 활황과 불황이 아닌 건강한 호황 상태를 골디락스 경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양극의 상태가 아닌 각 극단의 장점이 모여있는 이상적 영역을 골디락스라고 칭하는 것이다. 관계도 마찬가진 것 같다. 너무 떨어져 있어 서로의 온기가 전해지지 않은 상황도, 너무 붙어 있어 답답한 상태도 아닌 따로 또 같이의 이상적 환경을 조성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 마치 우리의 골디락스, 지구처럼 태양으로부터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위치에서 태양계 유일의 지적생명체를 탄생시킨 그 기막힌 거리감을 익힐 필요가 있다.
생명체뿐만 아니다. 빛과 색의 영역에서도 거리 두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을 그린 신인상파 대표 화가 조르주 쇠라 역시 그 기막힌 거리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붓으로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닌 점으로 찍어서 표현하는 일명 점묘법이라고 불리는 화법을 통해 색의 장점과 빛의 특성 모두를 살렸다. 빛 그러니까 가시광선을 통해 전달되는 색의 3요소 빨강R, 녹색G, 파랑B은 섞일수록 흰색에 가까운 밝은 빛을 낸다. 가산혼합이다. 반대로 빛을 표현하는 잉크와 물감은 청록C, 자주M, 노랑Y, 검정K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섞으면 섞을수록 검정에 가까운 낮은 채도를 보인다. 감산혼합이다. 결국 섞이면 밝아지는 빛을, 섞으면 어두워지는 물감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쇠라는 물감을 섞지 않고 색상 간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을 통해 색의 고유한 특성과 빛의 채도 모두를 살리는 영리한 기법을 구사했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다시 적당한 거리를 통해 감상자의 눈에서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감상자의 눈이 곧 팔레트가 되는 것이다. 물감 간 거리조정의 힘이다. 하물며 색도 이러한데 그 보다 더 복잡한 인간은.
여러 관계와 사회적 망 안에서 오늘도 나는 나다움과 우리 다움의 극단을 종종 횡단한다. 궤도를 돌며 뜨거운 지점과 차가운 지점을 알아간다. 그러다 내 안의 가능성과 우리의 충만함이 함께 느껴지는 지점에 도달한다. 하지만 영원한 정박은 없다. 모든 것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그래도 절묘한 지점을 경험한 나는 목적지를 잃진 않는다. 목적지는 골디락스.